오리지널 영화를 상영해주는 영화관에서 코코를 봤다. 텅 빈 시내는 설 연휴의 광화문 같은 분위기였다. 스크린은 작았지만 아늑하고 의자는 편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가족단위로 온 미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무는 거대한 산호초들처럼 반짝거린다. 힘겹게 달려 있는 낙엽들이 갓 형성된 태아의 주먹처럼 쪼그라들어 있고 그 손들 위에 눈꽃이 피어 있다. 차갑고 바삭거리는 공기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정교한 부조처럼 드러낸다. 입김을 불자 봉오리들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 밑에서 초록 빛깔이 서서히 스며들었고 나는 주변의 많은 것들이 아직 잠들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건축의 어원에 대하여 ─ 하이데거는 건축의 그리스 단어 아르키텍토니케를 추적하며 아네르 아키텍톤, 즉 텍톤을 주도하는 사람의 역할을 정의했다. 아네르 아키텍톤은 흔히 번역되는 건축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키텍톤의 어간을 이루는 아르케의 동사 아르케인은 호메로스의 뜻으로는 ‘시작하다, 통치하다’를 뜻하며, 따라서 아키텍톤은 아르케가 말하는 대로 지음, 즉 아르케에 순응하여 응답함을 뜻한다. 이러한 응답은 아르케와의 조화로운 울림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서로 잘 어울린다는 것, 이 둘이 서로 친밀하게 맺어져 서로 기대게 된다는 것, 이러한 하르모니아가 호메로스가 사유했던 텍타이네인, 즉 ‘짓다’라는 동사의 특징이다. 구축으로서의 사유에 대한 그리스적 어원 속에 이미 조응의 근거는 준비되어 있었다. 건축가는 시를 말함과 동시에 바로 그것에 질문을 던지는 대화자이다. 이것은 자기-대화이며 본질적으로 극작가로서의 플라톤의 정신이다. 건축가가 스스로에게 거는 대화는 자기 자신과의 존재적 동의를 뜻하며 그것은 곧 이론이 실체와 직결되게 됨을 의미한다. 이 조응은 하나의 파토스─하나의 사건─하나의 질서─하나의 장소로서의 건축이다. 건축가는 언제나 이 아르케적 문법을 통해 말하며, 그가 귀 기울여 듣고 뒤따라 말하게 되는 그의 언어는 그의 내부에서 발원하고 있는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의 건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