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운동을 끝내고 라디오헤드를 들으면서 전신욕을 했다. 비스듬하게 열린 천창 언저리에서 작은 오로라처럼 넘실거리는 김을 보니 오래전에 R과 교토의 한 료칸에서 묵었던 저녁이 생각났다. 그때 우리는 목욕을 하고 게이샤를 보고 반딧불이를 봤다. 수온과 체온이 같아질 때까지 누워 있다가 대충 물기만 닦은 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발코니로 나갔다. 칠흑 같은 숲속에 숨어서 누군가가 훔쳐볼 일은 없다. 그러나 본다면 또 뭐 어떤가. 몸의 열이 식을 때까지 김빠진 콜라를 마시면서 나는 노출증 환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멍하던 머릿속이 금방 맑아졌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욕조는 이 집에서 일종의 보너스 같은 것이다. 이런 게 삶이라면 걱정할 건 별로 없다. 따뜻한 물은 언제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젖은 수건과 옷들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계란을 푼 토마토 스튜와 버터 토스트를 먹었다. 열한시 이십오분. 오늘은 푹 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