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7 일

by 홍석범

2015. 1. 7



객관성이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어떤 환상이 함께 작용함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건축가가 어떤 장소(사건)를 너무나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고찰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의 주관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게 될 때, 이 건축가의 상태를 우리는 객관성이라고 이해한다. 그 말로 우리는 저 심미적 현상, 즉 화가가 번개와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풍경 속에서 또는 일렁이는 바다에서 자기 내면의 이미지를 관조하면서 개인적인 관점에서 해방되는 그런 현상을 상상한다. 즉, 객관성이란 사물 속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물이 그런 기분의 사람들 내면에서 드러내는 이미지가 사물의 경험적 존재를 재현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다. 아니면 그런 순간에 건축은 스스로 활동하여 순순한 수동태 위에 자신을 복사하고 모사하고 영상을 남기는 것인가? 이것은 신화이고, 게다가 나쁜 신화다. 더욱이 우리는 저 순간이 한 건축가의 내면에서 가장 힘에 넘치고 자기 활동적인 생산의 순간이며 최고 종류의 구상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는 점을 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장소를 사유하는 것은 모든 건축가의 은밀한 작업이다. 모든 것을 연결하며 사유하고, 낱개를 전체로 엮는 것.


건축의 역할은 잘 알려진, 그래서 아마 평범한 주제, 즉 일상의 선율을 편곡하고, 고양시키고, 포괄적인 상징으로 만들어서 원-주제 속에서 심오한 의미, 권력과 아름다움을 지닌 전체 세계를 예감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위대한 예술적 능력, 창조적인 비약, 실존적 현상들 속으로의 즐거운 몰입, 창작을 통해 주어진 유형을 발전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신들과의 관계에서와 같은 자유로운 창작 방식 ─ 이런 일에는 긍정적인 특성으로서의 객관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객관성은 종종 표어에 불과했다. 예술적 상태에서 주체는 전혀 드러나지 않게 되었으며 건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행사할 소명을 받았다고 가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건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를 우리는 객관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로 가장 고귀하고 희귀한 것이 드러나야 할 지점에서 말이다.


미스는 절대를 지향했기 때문에 시대적 건축의 담지자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감상이나 연민도 없이 다음의 말로 시민사회의 개인주의 시대와 작별을 고했다.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질문들이다. 개인은 점점 더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개인의 운명은 이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선언은 새로운 건축의 문법이 집단적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과 사회적 목적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개인이 폐기된 사회에서 삶은 어떻게 향유되는가? 시대의 ‘객관적 성격’과 대립되는 현대인의 고립과 이질감을 극복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고, 오로지 이 객관적 성격만이 ‘어떤 영역에서든 결정적인 중요한 업적들’을 결정했다. 미스의 시대정신은 그 시대의 주권을 시대 자체에게 귀속시키고 인간을 추방시켰다. 우리는 시대 자체의 비대한 권력을 감지한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의 신화로서 그 시대 자체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미스는 예술가를 시대정신의 통역자로 본 헤겔보다도 더 개인의 역할을 제한했다. 이제 현실은 더 이상 모사되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 형성해야 했다. 미스에게 창조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건축은 스스로 활동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본질적 조형은 니체의 빌려온 현존에 만족하지 않는다. 건축은 새로운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신화이다. 객관적 법칙은 스스로 형성하는 현실과 근본적으로 모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 폭력적인 통합의 시도는 다음과 같은 자기모순 위에 부자연스럽게 떠 있는 말로 귀결되었다. ‘건축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을 대표하며, 객관적 법칙을 토대로 자유롭게 전개되면서 스스로 자신의 질서를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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