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지하 궁전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받치고 있는 돌기둥이 있다. 이름 없는 신전의 폐허에서 기둥과 주각을 옮겨온 로마인들은 그것의 신비로운 힘이 물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지켜주리라 믿었을 것이다. 우리가 기둥 앞에 섰을 때 나를 엄습한 것은 숭고미다. 참됨과 선과 아름다움을 구별하지 않았던 고대인들에게 두려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현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훗날 칸트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그것을 서툴게나마 설명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칸트에 의하면 숭고미는 주체를 압도하는 거대함과 더불어 등장하며 이로 인해 주체의 내부에 형성된 숭고함은 알을 깨고 나오는 아브라삭스처럼 주체를 깨뜨린다. 나는 두려움보다는 일종의 애수의 감정을 느끼며 압도되었고 그 배후가 어떤 거대함이었는지, 무엇의 거대함이었는지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얼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지 않았고 이 사실은 그 상황을 공포스럽게 만들기보다는 서글프게 만들었다. 바닥에 뺨을 대고 있는 그 얼굴 속에는 줄지 않는 8만 톤의 물이 모여 있고 셀 수 없는 세기의 무게가 그것을 짓누르고 있다. 그 얼굴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 침묵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약간 소름 끼치게 했다. 피카르트는 얼굴이 침묵과 말 사이의 마지막 경계선이라고 썼던 듯하다. 침묵은 얼굴 속에 있는 하나의 기관처럼 눈, 코, 입과 그 외 모든 부분들의 밑바탕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얼굴 속에 침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침묵의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역시 피카르트가 썼듯 침묵의 자연 세계보다 더 큰 자연 세계는 없다.
이런 진부한 표현들은 내가 경험한 것을 어렴풋하게나마도 설명하지 못한다. 침묵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본 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Yerebatan Sarnıcı, Istanbul, Turkey
2018.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