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는 스피노자를 인용하며 현재의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는 칼의 아키타입을, 또는 책상의 아키타입을, 시계, 삼단 논법, 핀다로스풍 송가의 아키타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은 자기 스스로의 아키타입이 되려는 경향을 보이며 간혹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한다.
영국인 산책로를 걸으며 나는 그 순간 그곳이 해변의 아키타입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물론 그 장소가 내가 걸었던 해변 중 가장 아름다웠다거나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그 순간 그 해변은 스스로의 아키타입이 되었을 뿐이며 이 전형의 모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것이 전형인 이유로 거의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지상의 사물이 자신의 아키타입을 하늘로 투영한다고 믿었는데 이렇게 자기 자신의 영상이 된 그 해변은 흐릿한 잔상만 남긴 채 사라졌고 그때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그 바다와 그 날씨와 그 사람들의 비현실성에 놀라곤 한다.
Nice, France
2019.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