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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Jul 11. 2021

2021. 7. 3 토

어딘가 고고한 그 도자기상들이 단테의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렇게 믿고 있었고 나중에 가서야 그 믿음이 아무런 근거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별 상관없었다. 처음 네이브에 들어섰을 때 그러한 믿음은 분명 관념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내가 느낀 감동을 더욱 감동적이게 만들었다. 아직 밑에서 지나친 사람들이 올라오려면 약간의 시간이 있다... 조심스럽고 왠지 꼽추가 된 심정으로 기괴하게 늘어진 다리와 팔과 얼굴에 다가갔다. 그것들의 형태는 그 물성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이것이 고고함의 이유이다. 티끌 하나 없는 백색의 매끈하고 은은하게 빛나는 표면을 손으로 만지고 싶은 강한 욕구를 억눌러야 했다. 내 지문이 모든 걸 산산조각 낼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족스러웠던 걸까? 물성의 대조. 스케일의 대조.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만 표면적인 문제일 뿐이다. 정작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어떤 명료해 보이는 단어도 다시 은유가 될 뿐이다. 

연화좌를 연상시키는 제단을 만든 장인 정신 역시 놀랄만한 것이었다. 세정 작용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 조각가는 연꽃의 꽃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갤러리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세이스 노트붐의 시집에는 그가 회색 수도자들의 섬에서 쓴 33개의 시가 들어 있다. 이 아름다운 책을 살펴보기 위해 카페에 들렀는데 별로 맛있어 보이는 메뉴가 없고(와이파이 비밀번호는 foodforfuture였다) 오래 앉아 있기에 의자가 너무 딱딱했지만 크로이즈베르크 타워가 보인다는 이점이 있었다. 노트붐의 침대를 빌리고자 했던 천사를 상상하며 눈썹 같기도 하고 코 같기도 한 헤이덕의 감람색 발코니들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앤드류가 알도 로시의 초록색에 대해 얘기해 준 터무니없는 에피소드가 떠올라 팔라초 파르네제를 본뜬 그 건물을 보기 위해 샬로텐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이탈리아 건축가의 알록달록한 색들. 그 건물은 정말 드로잉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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