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석범 Dec 05. 2021

2021. 11. 28 일

도면을 그리는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작업을 지칭하며 회사 동료는 이그젝티튜드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며칠 뒤 침대에서 순간 이 단어의 의미가 불가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의 생각들을 이 순서와는 다른 산만한 방식으로 하게 된다:


정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면을 그릴 때 우리는 정확성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0.000001 유닛 따위의 오차가 없다는 것이며 기하학적으로 무결하다는 뜻이다. 또한 우리는 쉽게 그것과 일대일 대응인 곧 지어질 어떠한 사물을 상상한다. 최초의 기하학적, 즉 형이상학적 정확성이 있고 그 후에는 이 일대일을 통해 사물에 대한 대응적(물리적) 정확성이 있게 된다. 물론 이 두 번째 이그젝티튜드는 다소 은유적인 표현으로 도면의 수치와 실제로 일대일 대응하는 사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0.000001 유닛의 오차 정도는 무시하며 그 사물은 정확하게 지어졌다고, 혹은 반대로 그 도면은 그 사물의 지어짐을 정확하게 기록/예견/추상화한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글을 쓸 때의 정확성은?

우선 우리는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에 대해 질문해야만 한다. 

정확하게 쓴다는 것은 그것의 정확성을 (자 등을 사용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제도에서 건축까지의 일련의 과정과는 달리 일종의 종교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먼저 제도와 사물의 대응에서 나타나는 오차와 동일시할 수 있는 수치적 불일치—실제로는 29.9999cm인 자를 삼십 센티미터의 자로 묘사하는 식의 근본적으로 언어적 정확성의 한계가 아닌 물리적 정확성의 한계에 기인하는 오류—는 차치한다. 이제 우리는 책상 구석에 위치한 구리 재떨이를 묘사하고자 하는 어떤 작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는 한정된 분야에 대해 서술하는 계시적인 인물로(왜냐하면 오직 그것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리의 색조, 정확한 무게와 직경, 그 외 제작 비용과 판매 금액을 비롯한 수많은 자료들을 나열하기 시작할 것이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자신의 책상 북북서 방향에 위치한 물건들을 6권의 방대한(이론적으로는 무한한) 책에 걸쳐 기록하는 이 과업을 마친 라몬 보나베나는 평론가들이 원본에 충실한 정도를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유혹에 빠질 위험에 대비하여 작품에 나오는 모든 물건들을 파기했다. 작품에 어떠한 과학적, 미학적 가치도 부여하기를 거부했던 보나베나는 작품이 차지하는 고유한 영역에 대해 역설한다. 물론 이 일화는 정확성에 대한 문학의 패러디이다. 이류 작가는 단순히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고 일류 작가는 실제 구리의 색조와 글로 묘사한 색조가 다름은(같지 않음이 아닌)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설사 이러한 괴리를 우리가 은유(장밋빛-빨간 도시)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바로 그 이유에서, 즉 이미 그것이 시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렸다는 이유에서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정확한 글쓰기는 모순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정확한 글쓰기는 슈도-정확성(보르헤스가 마법적 정확성이라고 했던)을 표방한다.

다시 말해 모든 글쓰기는 슈도-정확성을 표방한다.


이제 우리는 로브 그리예의 카프카에 대한 명제, 즉 정확함보다 더욱 화상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떠올린다.  


슈도-정확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단어를 나 자신과 결합시키는 결속력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를 향해 말함을 결정함으로써 나의 말이 와 형성하는 유대, 즉 특정한 이해의 범위 내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여지(공간)를 주는 관계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언어를 세계로부터 철수시키는 것이며 내가 말할 때 언명되는 것이 세계 자체라는 사실로부터 얻어지는 언어의 권위를 언어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다. 작가는 더 이상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사물의 한계에 대한 감각에 따라 사물의 정확성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법치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과학적으로 정확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이 그가 정확성을, 다시 말해 슈도-정확성을 재발명해 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의 언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싱은 시 속의 예복이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언어가 나타내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있다(is)는 것이다. 이것이 슈도-정확성의 본질이며 보나베나가 언급한 작품이 차지하는 고유한 영역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1. 11. 23 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