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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Mar 01. 2022

2022. 2. 27 일

두다멜이 말러 교향곡 2번을 지휘했고 베를린 필은 빈자리 없이  찼다. 양쪽 발코니 측면을 파란색과 노란색 조명이 비추고 있었고 단원   명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공연을 헌정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했다. 당사자들에게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들이  음악을 듣는다면 기뻐할까, 아니 듣지도 못할 텐데 따위의 생각들을 했다. 그럼에도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하며, 적격인 제목인가... 부활.  우연의 일치가 단지 감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인류애가 저급한 탓이다.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음악은 자기  길을  것이고 언제나 진실될 것이다. 1악장이 끝나갈 때쯤  엄청난 체적에 완전히 압도된 상태로 활들을 보며 춤추는 칼들을 상상했다. 보르헤스는 전쟁을 그렇게 표현했지만 감상에 빠진 연상 작용이 아닌 음악의 최면술이었다고 써두자. 그것은 가차 없이 가슴을 쿵쾅거리게, 내가 내쉬는 숨을 보잘것없게 만들었다. 누군가 뒤에서 거친 숨소리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혹은 어떤 하급 천사의 이름을.  작고 붉은 장미여!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있을까? 그것이 어떻게   깊은 우물을 휘젓고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네가 타도한 것이 너를 신께 인도하리라! 장엄한 합창이 끝나고 음악이 하늘로 올라가버렸을  오케스트라는 마지막 음을  만들어낸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고 관객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2분간 완전한 정적이 흘렀다. 뒤에서 속삭이듯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물을 닦고 갑자기 우레처럼 쏟아지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몫을 보탰다. 이것은 인류애가 아니다. 이것은 온전한 음악의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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