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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Mar 31. 2022

2022. 3. 30 수

사고

트램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커밍스가 거대한 손이라고 불렀던 봄이 나를 길 쪽으로 유혹했다. 반짝거리는 맥주병 조각들과 말라비틀어진 개똥이 널린 흙길을 따라 터벅거리며 트램이 지나가게 내버려 둔 채로 나는 손을 따라갔다. 그것은 전차만큼이나 노란 수선화나 짧은 다리를 파닥거리고 있는 닥스훈트 같은 것들을 가리켰다. 방금 지나간 전차는 이 수선화만큼이나 노랗군. 저 닥스훈트는 다리가 길었다면 더 이상 닥스훈트가 아니었겠지. 기다랗고 위엄 있는, 혹은 통통하고 장난기 많은 (사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할 수밖에 없다) 집게손가락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도넛 가게 앞에서 끝을 구부려 그 옆 서점의 유리문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점점 작아져 이내 내 손가락만 해졌고 책장 모서리를 미끄러져 내려가 작은 책등에 소문자로 새겨진 자신의 주인 이름을 콕 찍었다.

다시 길로 나왔는데 횡단보도 맞은편에 구급차 두 대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아까 그 트램이 정차한 채로. 구급차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 동네는 15분에 한 번꼴로, 즉 배차간격이 20분인 21번 트램보다 더 자주 구급차가 지나간다. 트램의 문은 열린 상태였고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 정류장 한편에 들것이 놓여 있고 안쪽에서는 두세 명의 구급 대원이 바닥에 누워 있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위로 몸을 굽히고 있다. 누군가 쓰러졌나? 순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젠장! 아까 이 트램을 탔었어야 했는데! 그 안에서 어쩌면 죽음의 그림자를 목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얼마나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안타깝게도 트램의 바깥에 서서 고개를 기웃거리는 다른 시시한 구경꾼들과 같은 처지로 쓸 수밖에는 없겠군. 거침없이 이런 반인륜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두 유 스피크 잉글리시?” 그 몽골인의 피가 섞인 아시아인 여자는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난들 어떻게 알겠어요. 안에서 누가 쓰러진 모양이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오 이런, 회사에 늦는다고 전화하면서 짜증이 났는데 좀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요.” 여자는 아마도 이 전차를 타고 출근을 하려던 모양이다. 나는 불쑥 말했다. “뭐 그냥 술 취한 노숙자일지도 모르지요.” “노숙자요?” 그녀가 약간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얼마 전 티비에서 본 구조 24시 유의 어떤 프로그램을 떠올리고 있었다. 112가 신고를 받고 도착한 곳에는 열에 아홉 인사불성인 노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했다. “뭐 확률이 그렇다는 거지요.”

구경꾼이 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도  만한 것을 얻지 못했다. 정말로 노숙자라면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되겠군.  순간 거의 땅에 끌리는  벨벳 코트를 걸친 ( 따뜻한 날씨에)   백인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쪽으로 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구경꾼 몸이 엉거주춤 향하고 있던 트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가  옆에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누가 죽었나요?” 그가 흥미진진해 하는 눈으로 다짜고짜 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에이 설마요.” 그러고 나서 나는 트램의 열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죽었나? 그러나  폴대에 걸려 있는 수액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체에 주사를 꽂진 않을  아닌가. 잠시 마음을 놓은  나는 이상하게도 고집스럽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그냥  취한 노숙자일지도 모르지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페달에 발을 얹은  말했다. “좋은 하루 보내요!”

그렇게 경비원처럼 몇 분 더 서 있으니 드디어 구급 대원들이 누군가를 조심스럽게 들것 위로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손에 들린 것은 몸이 묶이고 주삿바늘이 꽂힌 작고 쪼글쪼글한 노인이었다. 그 순간 나는 몸을 휙 돌려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햇살이 드는 카페 구석에서 조금 전 산 커밍스를 읽을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손이여 나를 인도하라, 네가 온 지금 죽음의 그림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네가 가리키는 수선화와 닥스훈트와 소문자로 쓰인 작은 시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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