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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May 23. 2022

2022. 5. 14 토

지금은 21일이지만 기억을 더듬으며 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조만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의 일기를 쓰게  것이다. (실제로 나는 종종 그렇게 한다.) 국립박물관에서의  가지 인상들을 목록으로 적어두려 한다. 이런 형식이 아니라면 보나베나의 정신을 이어받아 두꺼운  여러 권의 분량으로  수도 있겠지만 그런 카탈로그는 이미 공인된 학예사들이 썼거나 쓸 것이다.


1. 엘크 뿔의 회색에 가까운 암갈색. 그 색은 상아색과 다르며 어떤 대지적인 것을 느끼도록 한다. 그 느낌과 강하게 대비되는 정교한 문양들이 가장자리를 따라 부조되어 있다.

2. 작은 세 폭 제단화 왼쪽 안쪽 날개에서 성 피터의 머리 위 구석에 떠 있는 천사의 지친 얼굴. 통통한 볼살과 한쪽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옷이 정겹다. 피로나 옷매무새와 같은 개념들은 인간적이지 않은 존재를 인간적으로 만든다.

3. 성 루시의 순교에서 목의 정중앙에 얇은 검 끝이 꽂힌 그녀의 졸린듯한 흰 얼굴. 루시의 이마는 은은한 램프처럼 빛나고 있고 그 긴 검을 거의 성스러운 방식으로 자신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있는 병사의 동작은 그것이 처형이 아닌 대단한 집중력과 정확성을 요하는 집도처럼 보이게 한다. 이 구성과 루시의 표정이 검의 긴 속성을 어떤 우아한 방식으로 돋보이게 만든다는 인상을 받았다.

4. 배나무로 조각된 내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얼굴의 아담과 이브. 귀금속과 보석 등으로 장식될 금세공품을 위한 모형인데 (따라서 보석이 들어갈 자리에는 보석 모양으로 조각되었다) 나는 그것이 약간 붉은 기가 도는 나무로 된 것이어서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것이 온갖 보석들과 금은으로 치장된 것이었다면 섬세한 조각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금방 질리는 종류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뭇조각이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담의 손에는 이미 반쯤 베어 먹은 크기 2밀리미터가 될까 말까 한 사과가 들려 있다.

5. 헤리 멧 드 블레의 직경 약 45센티미터인 톤도. 파라다이스는 짙고 깊은 녹색의 풍성한 나무, 풀들로 덮여 있고 여러 갈색의 동물들은 아주 자세히 들여다봐야지만 배경과 구분되기 때문에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다. 나무들 뒤편으로는 동양의 산수화 같은 풍경이 있고 중앙에는 보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 거의 분명한 거대한 물방울들로 장식된 생명의 분수가 있다. 그 주변에 그려져 있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중 가장 재미난 것은 이브의 탄생이다.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는 듯한 아담 옆에 주교관 모양의 파란 모자를 쓰고 붉은 망토를 두른 노인이 길쭉한 갈비뼈를 들고 검지로 가리키고 있는데 뼈 끝에는 벌써 갓난아기의 해골 같은 이브의 얼굴이 붙어 있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구체 중 첫째는 해와 달과 별과 새들을 담고 있고 가장 바깥쪽은 물결이 마치 대리석 문양처럼 보이는 청록색의 바다다. 빨간색 지문 같은 해는 근엄하고 팔자주름이 깊게 파인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6. 16세기의 나무로 된 체스 세트 중 엎드린 광대의 등 위에 올라타 한 손에는 국자를 쥔 채로 광대의 윗옷을 들춰 반쯤 내려간 바지 위로 그의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는 침팬지 모양의 루크... 그러나 왜?

7. 여러 겹의 유리로 이루어진 18세기 다이아파노라마. 불타는 도시와 해전 등이 그려져 있다.

8. 십이 월이라는 제목의 세로로 긴 벽 장식. 맨 꼭대기의 산양좌 그림으로 시작하는 이 기묘한 띠 가운데에는 공작털 왕관을 쓴 채 정면을 응시하는 남자가 있는데 그는 양팔 대신 나비의 날개가, 양다리 대신 털 난 날짐승의 허벅지와 발톱이 붙어있다.

9. 동화적이며 한적한 오후를 연상케 하는 요셉 어거스트 닙의 파리 전경. 그림의 삼분의 이 이상이 하늘이고 그 아래로 수평한 건물과 수평한 배들과 수평하게 늘어선 나무들과 수평한 강과 그 수평한 난간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있다. 헤이덕이나 스콜라리의 정투상도를 연상시키는 구도.

10. 고전적 기둥 모양의 괘종시계. 음각된 문자판 하단에 부채모양의 구멍이 있고 그 뒤에 부채꼴의 중심과 중심이 같고 시계침과 함께 돌아가는 작은 디스크가 있다. 이 프러시안 블루 바탕의 원판에는 금색 별들과 지름이 부채꼴의 반지름과 같은 보름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부채꼴의 양 가장자리는 직선이 아닌 부채 안쪽으로 볼록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디스크가 시계방향으로 서서히 돌면 변화하는 월상이 표현된다.   

11. 점묘법으로 그린 얀 투롭의 안개 낀 바다. 점들 사이로 비치는 밝은 지면이 그림을 은은하게 만든다. 오른쪽 하단의 수풀 속에서 뛰어오르고 있는 두 마리 개의 길쭉하고 유연한 형상이 귀엽다. 곡선들과 직선의 보기 좋은 융합.

12. 명예의 전당 오른쪽 첫 번째 감실에 나란히 걸려 있는 산레담의 세 그림. 대단히 수학적이고 어떤 신비로운 투명성을 지니고 있다. 수학적이기 때문에 투명하다고 해야 할까? 얇은 선들과 섬세한 색 조합은 그런 효과를 돕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의 다양한 디테일들은 마치 스카르파의 전시 공간에서처럼 구성되어 있고 그 각각은 다시 잘라내면 그 자체로 근사한 그림이 된다. 성모 마리아 교회의 내부 그림에서 산레담은 오른쪽 맨 앞 기둥에 휘갈겨 쓴 아이들의 낙서 밑에 자신의 서명을 그려 넣었다.

13. 이 외에도 이 ‘명예의 전당’에는 그 이름에 걸맞은 많은 그림들이 있다... 특히 베르메르와 드 호흐가 함께 걸려 있던 방에서는 팔라스마의 책을 생각했다. 그는 이 방에서 이 둘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편지를 읽는 여인에서 베르메르는 벽에 비친 반사광을 푸르스름하게 표현했다. 이것이 당시 빛에 대한 표현 연구에서 획기적인 점이었다는 짧은 설명이 그 옆에 적혀 있다. 그의 작업실은 북향이었기 때문에 그가 본 빛은 항상 푸르스름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쪽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이 푸르다는 과학적인 지식—이를테면 천공광은 짧은 파장의 빛이 더 많이 산란되는 레일리 산란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인해 푸른빛을 띤다는 식의—과 그 현상을 실제 물감으로 표현하는 기술 사이에는 아마도 우리 문외한들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어떤 본질적인 이해와 번역의 문제, 즉 예술가의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노력과 실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어렵고 기묘한 예술도 없는 것 같다.  

이 인상 깊은 갤러리 끝에는 렘브란트의 다소 비인간적인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림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유리관이다. 그 안에서 최근 두 달 동안 거대한 리넨 캔버스를 새로운 틀에 고정시키는 작업이 진행됐다고 한다. 기록물을 찾아보니 그림보다도 그 복원 쇼가 훨씬 흥미로웠을 것 같다.

14. 새롭게 알게 된 아드리엔 코르테의 정물화들. 거의 항상 미니멀한 석재 받침대에 올려져 있는 구성으로 오노 지로의 스시를 떠올렸다.

15. 자개, 상아 및 여러 종류의 대리석으로 상감된 검은색 대리석 패널. 블레의 톤도만큼이나 가지고 싶었던 아름다운 물건! 윗부분은 흑단 틀로 테두리를 둘렀고 모따기를 했다. 전경에는 죽은 피라무스와 티스베가 단검으로 자신을 찌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녀의 가슴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의 영롱한 색의 출처가 궁금하다. 오른쪽에는 분수, 왼쪽에는 나무가 있다. 대리석의 자연스러운 문양으로 표현된 풀밭에는 개구리, 토끼, 딱정벌레, 도롱뇽, 달팽이 등이 있고 별빛 하늘에는 다양한 곤충들, 올빼미, 박쥐가 날아다닌다. 각각이 전부 놀랄 만큼 세세하게 묘사되었다. 특히 분수의 물줄기와 나무의 수많은 잎사귀들. 내게는 본질적으로 동양적인 미의 상징 중 하나인 자개와 서양적 주제의 융합이 다소 놀랍게 느껴졌다.

등 등 등...


이 목록은 우리가 그 방대한 공간에서 우리들만의 보물 찾기를 한 대략 여섯 시간의 요약이다. 덧붙여 이 목록을 (내 딴에는 최대한 꼼꼼히) 작성하는 데 그와 거의 동일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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