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치킨을 먹으며 오피스를 본 한 시간 점심을 제외하고 여덟 시까지 집중해서 일했다. 확실한 목표와 아이디어가 있어 약간의 ‘건강한’ 스트레스를 동반해 순조롭게 해치웠다. 지난주는 별다른 이유 없이 계속 태만했는데 농땡이를 피우면서도 그 시간이 별로 즐겁지는 않았다. 그런 찝찝함이 계속 쌓인 탓인지 어제는 종일 기분이 불쾌했고 더욱 극심하게 아무것도 손댈 수 없었다. 나 자신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산책을 나갔을 때 (그런 산책은 코바흐 이후로 오랜만이다) 걸으면서 생각한 것은 암스테르담에서 산 튤립 화병의 작은 깔때기 같은 구멍들에 꽂을 꽃들을 꺾어 엄마의 모자 속에 운반하던 것과 산책을 나오기 직전까지 허투루 흘려보낸 다섯 시간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내가 제정신이었다면 했을 수 있을 일들의 목록이었다. 내 부탁으로 K가 짧은 곡을 쳐서 보내줬는데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만 있다면 참 행복할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 역시 산책을 하기 위해 일을 마친 뒤 장을 봤고 간만에 사람다운 식사도 차려 먹었다. 또 샤워를 한 뒤에 일층에 내려가 삼십 분 정도 책을 읽었다. 기분전환을 위한 새로운 시도였는데 더 오래 읽지 못한 이유는 누군가 빌어먹을 블루투스 스피커로 시끄러운 음악을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축구를 보는 사람들과 당구를 치는 사람들이 몇 있긴 했지만 말소리라 그다지 방해되지 않았다. 앞으로 종종 내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외로운 것일 수도 있다.
내일부터 삼 일간은 회사에 가서 일할 것이다. 지난주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결국 집에서 안 나갔고 얀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번 주는 진짜로 실천에 옮길 것이다. 그러면 집에 오는 길에 부흐발트에 들러 바움쿠헨을 살 수 있다. 내일의 계획은 퇴근 후 사진 작업을 좀 하고 자기 전에 영화를 보는 것이다. 성화에 못 이겨 몇 장을 보여줬을 때 K는 이 대단한 ‘사진집’을 몇 권이나 만들 것인지, 크라우드 펀딩 같은 것으로 해볼 생각은 없는지, 한국에서 인쇄할 거라면 언제 다녀올 것인지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한껏 들떠서 첫 권은 자기가 예약했다는 둥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유치하지만 그것은 힘이 됐고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 사실이다.
영화는 찰리 카우프만의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볼 생각이다. 혹은 아노말리사를 또 보거나. 그 이상한 영화는 나를 아마 더 우울하게 만들겠지만 동시에 차분하게도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