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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Sep 14. 2022

런던 일기

9월 13일 오후 11시 20분. 이렇게 날짜를 쓰는 이유는 내가 이미 런던이 아닌 내 방의 안정적인 정적 속으로 돌아와 있음을 밝혀두기 위해서다. 지금부터 틈틈이 지난 나흘간 런던에서의 일과를 적으려 한다. 이것을 꼭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 기간 내내 내가 시달렸던 욕구불만을 최대한 자세히 진술하기 위함이다. 글을 통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불순물들이 밝혀지고 소모되기를 바라면서. 휴가는 끝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때의 사건들과 생각들을 다소 자유롭게 씨실과 날실로 엮을 수 있다. 이 태피스트리는 꿈보다는 해몽의 성격을 띠겠지만 수전 손택이 경고했던 사진을 찍기 위한 전략으로서의 여행처럼 여행이 무언가를 쓰기 위한 전략이 되는 것 역시 피치 못할 사정일지 모른다. 더군다나 원래 이 짧은 휴가의 취지는 읽고 쓰고 걷는 것이었지만 정신이 산만한 상태로 그저 떠돌아다니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이제(라도) 써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또한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지도인데, 그 배회가 와해되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속물적인 두려움이 세 번째 이유이다. 그 걷기를 통해 내가 무언가 얻기를 바랐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종잡을 수 없다. 또한 이 일기를 통해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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