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석범 Sep 18. 2022

런던 일기

9 15 오전 0 15. 되는대로  줄이라도 던져 놓자. 이렇게 하지 않으면 피곤한 의지는 게으름에 또다시 지고  것이다. 어째서 리도 나약할까? 일단 뭐라도 끼적이면 그다음에 이어서 쓰는 것은 훨씬 수월한데 텀블러에 돌들을 쏟아붓는 것과 비슷하다. 돌들은 굴려지고 계속 서로 부딪히면서 점점 동글거리고 반짝이게  것이다. 연질 상태의 기폭제 문장은 마지막에 삭제하면 그만이다.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바로   있는 글쓰기 근육이 없기 때문에 거의 매번 이것을 반복해야 한다. 런던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같은 문장은 전혀   없었다. 일시적으로 글쓰기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없으며  욕구불만은 젖은 유령처럼 나흘간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하늘과 대양뿐인 항해 중에는 사람들이 꾸준히 일지를 적는 반면 관찰 대상이 많은 육지를 여행할 때는 이를 게을리한다는 점을 기묘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의지나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인지 모른다. 미술관에 들어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낯선 곳에 있을  우리는 전부 눈이기 때문에 손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일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거리가 나에게는 심리적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일수록 좋다. 그래서 이제야 나는 이것들을 던져 넣고 있는 것이다.


9월 17일 오전 11시 21분. 손이 펜을 쥔 채로 꼼짝 않고 있었던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각각의 꽃다발을 보며 계속 strangely grey yet colourful day로 시작하는 문장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둘째 날 아침이었고 피카딜리 거리의 카페에 앉아서 빈 노트를 펴둔 채 우유 조금과 설탕 두 조각을 넣은 얼그레이를 홀짝거리며. 비를 머금은 축축한 회색빛 하늘과 곧 여왕에게 바쳐질 꽃들의 행렬이 그런 생각을 하게 했지만 결국 손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고 이 문장은 계속 반쪽짜리로 남아있다. 지금 이곳 리블링스에서 그 표현을 다시 떠올리면서 이상하게도 그건 이미 인화된 사진처럼 그 순간과 결부된 어떤 불가침 한 것이라고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It was a strangely grey yet colourful day and I was looking out the window somewhere in the middle of Piccadilly와 같은 식으로 그 표현을 지금 쓰는 일기를 위해 다시 재단할 수는 없다. 지도를 쓰려면 어쨌든 이런 단편적인 인상이 아닌 좌표에서 시작해야 한다.

착륙을 한 뒤 기차를 타고 리버풀 역에 도착했을 때가 대충 오전 여덟 시였던 것 같다. 센트럴과 빅토리아선을 타고 핌리코에서 내린 뒤 코너를 돌아 리전시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그 거리의 끝 무렵에 위치한 다이너는 주문한 메뉴가 나오면 카운터에서 two eggs with a sausage and beans! 따위의 말을 소리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쩌렁쩌렁해서 자신의 내밀한 아침 식사 내역이 온 동네에 여지없이 폭로되는 것을 다소 께름칙하게 여기는 손님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큰 가방을 멘 두세 명의 여행객들과 동네 사람들이 음식이 푸짐하게 올려진 접시와 40리터짜리 전기 온수통에서 따라진 차 또는 커피를 배급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작은 식당에 대한 내 로망은 아마 호퍼의 그림에서 시작된 것 같다. 두껍고 폭신한 두 토스트 조각을 포함해서 two eggs and hash browns, bacons with a sausage and beans!가 그날 아침 나의 내역이다. 배를 채운 뒤 찾아본 가장 가까운 서점이 빅토리아 거리의 워터스톤즈였고 단순하지만 세 달 전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 그곳으로 향했다. 지금 찾아보니 그때 지나간 거리의 이름은 빈센트 스퀘어와 에머리 힐이다. 빈센트 스퀘어의 초입에서 루서포드 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멀리 웨스트민스터의 빅토리아 타워가 보였다. 이 지도에 인덱스가 있다면 이 짧은 경로에 이런 주석이 추가될 것이다. 평화롭고 조용함. 이후 모든 런던 산책의 모태.   

빅토리아 거리로 들어서니 금방 차들이 많아지고 출근객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아홉 시가 지난 시각 서점은 문을 열었지만 찾던 책은 없었고 직원이 손에 쥐여준 쪽지에는 다소 삐뚤거리는 필기체로 피카딜리 거리의 주소가 적혀있어 자연스럽게 버킹엄 궁과 그린 파크를 지나게 됐다. 팔라스 거리를 따라 올라간 뒤 막다른 길인 스타포드 플레이스의 거의 끝까지 걸어가 길 끝이 집들로 둘러져 있는 그 풍경이 어쩐지 소설 같다고 느끼면서 왼편의 두 건물 사이로 난 샛길로 빠지자 바로 앞이 궁이었다. 스퍼 로드를 따라 돌아가니 정문 앞에 약간의 군중이 모여 있다. 그리고 그린 파크 역 방향으로부터 걸어 내려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 인파를 거스르기 싫어 살짝 옆으로 비켜 잔디 위에서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피카딜리로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깃발들이 걸려 있고 근사한 사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처즈는 서거한 여왕에 대한 존경과 애도의 의미로 문을 닫았고 포트넘 앤 메이슨의 쇼윈도에도 검은 블라인드가 쳐져 있다. 이전 지점보다 훨씬 큰 워터스톤즈에 도착해 책을 몇 권 산 뒤 이층 카페 구석의 소파에 몸을 파묻고 드디어 거리 배회를 읽는다. ‘But, after all, we are only gliding smoothly on the surface...’

이날의 짧은 걷기는 사실상 여기서 끝난다. 그 후에는 다시 쫓기듯 지하철과 기차로 갈아타 리브스덴으로 갔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