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16 화

by 홍석범

호크니는 사진기가 고정시키는 상과 실제로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임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진기는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기하학을 통해서만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깊이가 주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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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seinem Buch schrieb Zumthor: Ich zeichne räumliche Diagramme und einfache Körper. Ich versuche, die erdachten Körper als präzise Objekte im Raum zu sehen, und es ist mir wichtig zu spüren, wie sie aus dem Raum, der sie umgibt, einen Innenraum ausgrenzen oder wie sie das unendliche Raumkontinuum in der Art eines offenen Gefäßes einfangen. Es hat mich dazu gebracht, Architektur als Grenze nachzudenken. Wie ich es verstehe, geht es nicht um die Wände oder die Säule. Die Grenze, von der Zumthor redet, ist nicht der Körper an sich, sondern die Atmosphäre, die darin enthalten ist. Durch einen architektonischen Akt entsteht eine Grenze. Aber es bleibt mir immer mehr Geheimnisvoll, wie ein Gebäude tatsächlich als eine Grenze fungieren. Ich glaube es nicht, dass es eine geschlossene Tür ist, die das Innere von dem Äußere ausgrenzt. Es kommt darauf an, ob man das Gefühl bekommt oder nicht, als ob man gerade eine neue Welt betreten hätte. Ich glaube, diese Grenze befindet sich in den Köpfen der Menschen. Als Zumthor sagte, die Materialen sind selbst nicht Poesie. Aber Ich denke, auch wenn die sich in einer ganzheitlichen und angemessenen Form verbunden sind, werden sie noch keine Poesie, weil Poesie etwas ist, was wir nur dazwischen finden. Was soll das Raumkontinuum sowieso bedeuten eigentlich? Es bedeutet, dass man die Welt als Ganzes und ungebrochen erkennt.






2015. 1. 16



건축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즉 건축의 객관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건축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건축가의 신조를 위한, 디티람보스적 극작가의 예술로부터의 팔리노디아*



건축가에 관해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언급될 수 있으리라. 그는 지금까지 말하려 하지 않았던 자연의 모든 사물에게 언어를 주었다고 말이다. 그는 침묵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노을, 숲, 안개, 협곡, 산정, 밤의 소나기, 달빛 속으로 들어가서 울리고 싶어 하는 그것들의 숨겨진 욕망을 알아낸다. 철학자가 생물체나 무생물체에는 현존재를 갈망하는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면 건축가는 그 의지는 모든 단계마다의 소리 내는 현존재를 원한다고 덧붙인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축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사물을 대략적으로 ─ 아주 대략적으로만 ─ 이해하여 그 결과 사물에 순응하게 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건축의 가장 고귀한 대표자들도 단지 진정시키고 위로해주는 건축의 힘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평온을 구하는 나태한 이들은 건축이 찾고자 한 것을 자신들도 찾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와 달리 모든 건축의 가장 중요한 문제란 사물이 어느 정도까지 불변적인 성질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며,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경우 가차 없이 용감한 마음으로 변화 가능하다고 인식된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 돌진해나가는 것이다.


건축가에게서는 세계의 모든 감각적인 것이 몸을 위한 현상으로서 모습을 드러내려 하며 흡사 몸을 획득하려 한다. 그의 예술은 청각 연주로서의 하나의 세계이며 비밀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시각 연극으로서의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길, 그리고 그 역의 길이라는 이중의 길로 그를 항상 인도해 간다. 그에게 ─ 그와 함께 관찰자에게도 ─ 끊임없이 강요되고 있는 것은 볼 수 있는 움직임을 마음과 근원적 체험으로 다시 번역하는 일이며 역으로 깊이 숨겨진 내면의 움직임을 현상으로서 보고 그것을 일종의 가상적 몸으로 꾸미는 일이다. 이런 모든 일이 바로 건축가의 본질이며, 그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자면 건축가란 배우, 시인, 음악가를 포괄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강한 인식자의 안광은 그 이전에는 조화되지 못한 채 분열되어 있던 것을 하나로 일체화함으로써 엄청나게 가득하고 황폐해 보이는 혼돈을 지배한다. 낯설고 차갑게 마치 서로 분리된 영역에 존재하는 듯한 두 가지 사물에서 하나의 관계를 발견해냄으로써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세계를 단순화하는 자다. 우리는 건축가에게서 이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반대하는 이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개별화되어 있고 연약해진, 버려져 있는 것을 모두 묶어 서로 연결하고 있다. 그는 수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매우 위대한 문화의 힘에 속한다. 그는 예술, 종교, 다양한 민족사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다층적 역사가는 아니다. 그는 단순히 편찬하고 정리하는 정신과는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그는 수집된 것을 합성해내고 동시에 영혼을 불어넣는 자, 즉 세계를 단순하게 조형해내는 자이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자신에게 건축을 하게 한 본능을 파악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직관해낸다. 그리고 자신의 본능을 인식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했을 경우, 그는 대중들의 마음에서 그 반대 과정이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 자신의 예술을 통해서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이야기할 뿐 더 이상 관객이나 민중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힘 있는 대화를 위한 최대한의 명확함과 능력을 자신의 예술에 부여하려고 씨름한다.



* 니체,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건축가에게는 총체적 행동으로서의 통합하는 힘이 요구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 그 끝을 세계의 모든 방향으로 날려 보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행위와는 반대되는, 이제는 풀렸던 매듭을 다시 묶는 행위가 필요하며 이것이 본질적인 과제이다. 건축가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나의 강력한 인식. 하나의 강력한 언어. 이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이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된다.


니체는 바그너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그대들은 나의 신비를 지나가야 하며 스스로의 정화와 감동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것을 감행하라. 그리고 그대들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흐릿하게 빛나는 자연과 삶의 조각을 희망해보라. 나는 그대들을 실제 존재하는 나라로 인도할 것이다. 그대들이 나의 동굴에서 그대들의 빛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대들은 어떤 삶이 더욱 실제적인지, 원래 어디에 낮이 있고 어디에 동굴이 있는지를 말해야만 할 것이다. 자연은 내부로 향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지고, 강력해지고, 충만해지고, 풍성해진다. 그대들은 자연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이 습관적으로 살고 있듯이 말이다. 그대들은 자신이 다시 자연이 되는 것을 배워라. 그리고 내 사랑의 빛과 불의 마술을 통해 자연과 함께, 자연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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