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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Mar 19. 2023

2023. 3. 18 토

종종 햇살 아래서 보다 기둥 뒤 그늘에 기대앉아 햇살 속 다른 사물들을 관조함으로써 햇살을 더 온전히 즐길 수 있다. 누군가 일어나 자리를 뜨고 길가 테이블 위에 남겨진 유리잔이 햇살을 받으며 점점 투명해진다.


존 버거는 흥미롭게도 영혼이 장님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조금 전까지는 이어폰 속 음악에 심취해 있는 맞은편 여자와 나밖에 없이 고요하던 카페 안이 순식간에 사람들로 꽉 찼다. 에스프레소를 원샷 한 이탈리안 남자들이 왕왕거리고 바리스타는 쉼 없이 커피가루를 비우고 다시 채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왁자지껄한 인간과 물건의 소리들이 잦아들고 빈 잔과 누군가 머리로 치고 지나가 흔들거리는 램프만 남게 되면 나는 다시 보지 못하는 영혼의 속성에 몰두할 수 있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갑자기 옆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에 사방에 떠 있는 미세한 먼지들이 드러나자 자유롭게 방황하는 생각은 키프로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읽었던 러스킨의 지오토를 떠올린다. 파도바에서 내가 봤던 것을 복기하기 위해 그것을 읽었지만 오히려 내가 본 것, 혹은 봤다고 상상하던 것은 러스킨이 본 것, 혹은 그가 봤다고 상상한 것과 구분할 수 없게 돼버렸다. 버거가 기록하고 있는 사물 안으로 진입하여 그것의 모습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재조정하고 수집하는 중개인이 되는 꿈은 사실 건축가의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오토는 자신의 붓으로 완성한 예배당 내부 구석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바로 그 건물을 어깨에 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예술 평론가였던 러스킨에게 그 작은 표식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었지만 한 젊은 건축가는 그 속에서 자신의 신조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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