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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Mar 31. 2023

2023. 3. 30 목

벌이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다. 티스푼으로 꿀을 떠 갖다 댔더니 겨우 입만 내민다. 꿀 속에 붓처럼 퍼져 허겁지겁 빨아들이는 그 입이 신기하다. 오렌지색 복슬한 궁둥이를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어봤다. 엄마에게 사진을 보내니 흙장이벌이라고 한다. 이번엔 드디어 진짜 벌이다!


창밖을 봤는데 머리 위에 파인애플을 올린 대머리 할아버지가 조깅 중이다. 균형감이 범상치 않다.


점심시간에 머리를 잘랐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깔끔해서 내가 좋아하는 모하마드는 오늘도 물어본다. 구레나룻 일자로 자를까? 아니 그냥 그대로 둬 자연스럽게. 그리고 또 물어본다. 제품은 뭐 발라줄까? 아무것도. 미스트도 싫어? 응 아무것도. 아 그렇지 자연 그대로, 자연! 커트비가 3유로나 올랐다.


계단실 문짝을 숨길 방도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멍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역광이 강하게 비추며 주의가 사로잡힌다. 창문은 온통 금빛이고 하늘은 회청색이다. 소파 위 무릎 책상 표면은 반사광으로 백색이고 초록색 책(아미엘의 일기) 가장자리는 은색으로 예리하게 빛난다. 이건 비다!라고 생각한 순간 영락없이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창문에 빗방울들이 후드득 튀기면서 배경은 더 안개처럼 뿌예지고 사물들이 확실해진다. 바닥의 목재 문양까지도 가장 뾰족한 펜촉으로 그린 듯한 이 키아로스쿠로는 가장 정교한 사진보다 더욱 정교하다.


항상 걷는 길로 산책을 하고 카페로 갔다. 아이스 카푸치노를 시킨 뒤 재킷의 안쪽 주머니에서 싯다르타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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