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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Apr 23. 2023

2023. 4. 22 토

빨래를 들고 뒤뜰로 나갔을 때 멀리서 누군가 쓰레기를 던져 넣었다. 공병 부딪히는 소리가 여름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기온은 22도까지 올라가 사람들이 반팔과 반바지 차림이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은행과 빵집에 들렀다. 인출한 돈이 새 지폐라 기분이 좋다. 가는 길에 발견한 헌책방의 창가에 있던 낡은 공상 과학 소설을 샀다. 그것이 공상 과학 소설이지만 낡았다는 단순하고 모순적인 이유에서. 찾아보니 당시에는 꽤나 읽혔던 모양인 어떤 의사가 70년대에 쓴 이야기다. 빨래를 널고 비닐봉지에 싼 브뢰첸 두 개는 냉동고에 봉투에 담은 돈은 서랍 안쪽에 잘 넣어둔 뒤 짜장라면을 끓여 먹고 집을 나섰다. 거의 열흘간의 비 끝에 봄을 건너뛰고 여름이 오려 한다.


얼마 전 요즘의 소확행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소확행이라는 개념을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에서 차용해 자신의 신조로 삼았다는 걸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 카버를 읽기 시작했다. 갓 구운 빵의 기원일 작고 좋은 것은 생각보다 음울하고 기괴한 면이 있는 이야기다. 성당은 간단함과 여운이 충격적이다. 나는 그것이 미국 작가의 표본이자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인만이 그렇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테제는 동시에 아일랜드인,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아르헨티나인 등의 차이점을 시사한다. 아르헨티나인이 쓰는 것은 반대로 그만이 쓸 수 있다. 문학은 전부는 아니지만 결국 피로 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 결론은 이것이 아마도 내 유일한 소확행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 일 외에는 집중력도 금방 떨어진다. 자주 졸리고 기운이 빠진다. 그래서 밤늦게 카페로 간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창가 자리에 앉아 에스프레소 속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며 카버의 짧은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혹은 헤세의 싯다르타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아포리즘이나 페소아의 자기 고백이나 아미엘의 신앙 고백 등을.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이유는 양이 적어서고 창가에 앉는 이유는 페이지를 보는 만큼,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이 그리고 자주 창밖의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관찰이라고는 할 수 없고 몽상도 명상도 아닌 그 휴지의 순간에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을 보면서 멍하니 이렇게 되뇐다. 주군이여, 당신이 지휘한 항해 덕분에 ‘현실 세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지성의 세상’은 나로 인해 발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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