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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Apr 26. 2023

2023. 4. 23 일

오후에 타이파크에 가다. 아네는 우연히 전날 같이 파티를 한 친구들을 만나 그들 옆에 돗자리를 붙인 뒤 그 위에 내가 잘 찾을 수 있게 빨간 점퍼를 입은 채로 서 있었다. 친구들은 각자 챙겨 온 빈 통을 들고 음식을 사러 갔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햇볕을 쬐며 앉아 있었다. 남자친구인 막스와의 통화 내용, 새로 시작한 스튜디오 프로젝트, 비엔날레 등에 대해 아네가 하는 얘기들을 한 귀로 들으면서 그곳에 모인 온갖 사람들을 둘러본다. 곧 팟타이가 담긴 김 서린 통을 든 친구들이 왔고 내가 돌아가면서 악수를 하는 동안 (그들의 손목에는 아직까지 시시포스 도장이 선명하다) 아네 역시 빈 통을 꺼냈다. 스무 개 남짓 되는 포장마차들이 입구 쪽에 줄지어 서 있고 메뉴는 전부 타이음식이라 사람들은 공원을 원래 이름이 아닌 타이파크라고 부른다. 채식하는 아네는 죽순 볶음, 나는 닭튀김과 태국산 베이비이까를 샀는데 치킨과는 다른 그 닭튀김은 베를린에서 먹은 것 중 최고다. 역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 단순하지만 사실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네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고 말한다. 이 말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


친구들이 먼저 떠나고 우리는 조금 더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내가 그들의 첫인상이 무기력하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인다고 하자 보통 약을 하면 다음날 후유증이 그렇단다. 인공적으로 좋은 기분을 쥐어짜낸 뒤에 일시적으로 불감증이 오는 것은 불가피한 이치겠지. 뭐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쩐지 당장은 그들보다 내가 더 무기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그들은 즐기면서 신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이 매너리즘과 욕구불만과 발작적인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시 약이나 빠는 게 답일지 모른다. 이게 요즘의 내 상태다. 아네에게 자전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집까지 걸어갔다. 그제야 그 동네가 샬로텐부르크란 사실을 깨달았다. 걷기 정말 좋은 날씨다. 이렇게 걸으니까 기분이 한결 낫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방에 도착하자마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고 이물질이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예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다. 매일 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와서 시끄럽고 자연스럽지 않은 소리를 내며 섹스를 하는 얼굴에 피어싱이 많은 아네의 바이 룸메이트 얘기를 들으며 암스테르담에서 사 왔다는 밍밍한 푸딩을 퍼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몇 정거장 앞에서 경찰들이 진을 치고 뭔가를 하고 있는지 기차가 가다 서다 가다 선다 한다. 벨뷔에서 또 한참을 서 있는 중 차장이 승강장 반대쪽 문을 잠깐 열었다 닫을 테니 무심코 내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방송한 뒤 오른쪽 문을 전부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훅 들어왔고 나는 그 바깥쪽 선로 너머로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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