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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범 May 20. 2023

2023. 5. 19 금

루이지애나에서 문득 모든 그림들을 한 장소에 모을 수 있는 다음 구상이 떠오르다.


기억에 남는 작품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의 사진을 찍는 바보 같은 짓을 고집하면서. 그것들을 묶은 일종의 미술관 앨범은 그림들의 밀리유에 대한 기록물이 될 것이었다. 미술관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공간도 그림도 아닌 공간 속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공간에는 감동을 그림에는 실망하거나 그 반대를 경험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루이지애나는 선자였고 나는 막연히 위대한 작품들과 그에 걸맞은 아름다운 공간들이 끝없이 나열되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이 놀랍도록 간단한 생각에 이르렀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을 사진 앨범이 아닌 미술관의 형태로 묶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접근법은 작품만이 아닌 내가 그것들을 처음 경험한 공간들—수많은 미술관들을 조합/재해석한다는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도서관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문학적 조합과 재해석의 과정이 한 사이비 고고학자의 집필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미술관에서는 보다 몬스터에서와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즉 일리야 카민스키가 파울 첼란에 대해 했던 것처럼 나는 먼저 각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위한 헤리 멧 드 블레의, 프라 안젤리코의, 빌헬름 하머스호이 등의 방을 설계할 것이다.



은연중 이 계획에 영감이 된 것이 분명한 장소로 시자의 두 피카소를 위한 미술관을 적어둬야 한다. 세랄베스에서 25년이 지나서야 영문 번역이 된 시자의 98년 회고록을 발견했는데 그의 방대한 작품 양에 상대적으로 간소한 책과 구술 기록의 어투가 마음에 들었다. 그 첫 장에 이 프로젝트에 대한 언급이 있다. 92년 마드리드의 문화 수도 계획 일환으로 시자는 오에스테 공원에 작은 미술관을 제안하면서 피카소의 작품 두 점을 선택했다. 첫 번째는 게르니카였는데 당시 막 레이나 소피아로 옮겨진 전시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하나인 임신한 여인과 게르니카의 대비되는 상징성을 고려해 각각을 위한 두 개의 길쭉한 갤러리를 분리하고 입구와 중간의 작은 통로를 통해서만 연결되게 했다. 스케치를 보면 화살촉 모양의 입구가 도시의 경계에 박혀 있고 그곳으로부터 V 모양으로 자라나는 두 개의 매스가 공원을 뚫고 들어가는데 시자는 프로젝트의 기원이 도시의 파사드와 자연의 대치에 있다고 말했다. 프로젝트 앞의 부정관사는 이것이 그의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원론적인 생각인지 이 미술관에 대한 생각인지를 다소 불분명하게 한다. 다만 이후 지어진 보아 노바나 수영장에서 그는 경계 지대를 반복해서 다뤘다.


30년이 지나 사유원의 설립자는 어디선가 이 미술관 설계안을 우연히 본 뒤로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는지 시자를 초청해 자신의 수목원에 그 모양 그대로 지어달라는 비정통적인 의뢰를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부지를 면밀히 연구하기로 소문난 그가 이를 승낙했다는 것이다. 결국 경계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약간의 수정을 거쳐 피카소 미술관은 피카소 없는 경북 군위의 산자락에 지어졌다. 올해 봄 K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내 도서관의 한 선례를 보고 있다는 혼자만의 설렘이 있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루이지애나에서 각 작품들을 연결하는 프로미나드를 걸으면서 시자의 두 개의 작품을 위한 두 개의 갤러리 역시 비슷한 공간의 관대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미술관의 기원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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