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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Jul 12. 2023

클래식의 죽음에 대해

2021-01-14 19:30:29

소시 적에 모시던 은사가 한 분 계셨다.

그 분이 말하길, 클래식은 이제 죽음의 지경에 다다렀다고 항상 역설하셨다.

지금은 거의 음악은 접다시피 하시고, 다른 사업에 열중 중이신데, 이 분에게도 많은 배움을 얻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립한 이론으로 말미암아 클래식의 부활을 넘어, 이 지구 상의 온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올 거라고 하셨다.

뭣도 모를 때는, 우와 대단하다 싶었고, 나는 정말 그 때는 그 분이 지구 최강인 줄 알았다.

그렇게 대단한 이론을 창조하신 분이, 지금은 음악을 접고 돈벌이나 하신다니,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럴 수록 그 분 밑에 배우던 나도 비참해지긴 마찬가지이지만.

괜찮다, 그래도 나는 그 분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었고, 내가 그만큼 미약했기 때문에, 그런 미 성숙한 정신상태라면, 누구한테 배워도 세뇌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음악의 근간은 가히 서양식 음악, 클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동양음악은 서양음악에 비해 충분히 깊이있고 차원높은 음악의 면모를 갖고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꽃을 피우지 못 한 것에 대해서는 참 아쉬움이 크다.

지금의 동양음악이라고 한다면, 그저 동양의 전통음악에 그칠 뿐이다.

관광지, 전통문화 홍보나, 전통 문화 계승이라는 명목의 소수 그룹일 뿐이다.

나 역시도 우리 국악을 이해해 보려고 유튜브의 국악 공연을 틀어 보면, 사회자가 한결같이 관객들에게 졸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그런 고문석을 뭐하러 돈내고, 시간 낭비해 가면서 앉아있을 필요가 있는 지.

시대는 변하고, 그에 따라 대중의 정서는 변하는데, 아직도 한복입고 풍월을 읊고 있다.

이 쯤에서 각설하고.


이러한 클래식은 그래도 현대음악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영역을 그런대로 건재하게 지켜왔는데, 사실, 내가 비판한 국악과 양적으로 우위에 있는 점을 제외하곤 큰 차이가 없다 할 정도이다.

당대의 클래식 음악가들은, 시대별, 사조별로 구별할 정도로 유럽에서 크게 융성했다.

근대까지 음악 영역을 확장시키며 그 맥이 잘 이어져 내려 왔는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완전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과거 역사 속의 클래식 레퍼토리를 재해석해서 녹음하고, 꾸준히 공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과거 클래식 원형을 소비하는 것으로 장르의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클래식이 살아서 생동한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려면, 클래식의 플랫폼으로 신곡이 꾸준히 나와 줘야 한다.

세계적인 천재 연주자, 새롭게 각광받는 지휘자가 있다 해도, 그 것은 과거 레퍼토리를 그대로 울궈 먹는 것에 지나지 않다.

우리 속담 중의 죽은 아들내미 고추 주무르고 있는 신세와 뭐가 다른가.


이제는 클래식을 대학에서 전공을 하고, 소비하는 저변은 과거 베토벤과 바흐 시절보다 도리어 낫다고 보는데, 왜 정작 그런 작곡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클래식을 치열하게 공부하고, 하루 온종일 맹연습하는 음악가들이, 아직도 그 시대의 낡은 그림자 안에서 놀아 나고 있다.

물론, 내가 심도있게 보지 못 하는 관계로, 신곡을 작곡하는 클래식 작곡가는 분명히 소수 있을 것이다.


만일, 클래식을 과거 시대 유럽음악이라고 시간, 지리적으로 규정지어 버린다면, 클래식은 죽었다, 살았다를 논할 필요는 없다.

원형 그대로 잘 박제시켜서 대대로 보존시키면 될 뿐이다.

그래서 클래식이라 명명된 것이고, 우리가 지금 클래식이라고 명명하는 것도, 그 당시에는 클래식이 아니라, 당대 음악이었으므로, 클래식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래식을, 당대의 유럽 음악에서 발현되어 명맥을 잇고 있는 하나의 사조로 본다면, 이 것은 얘기가 달라진다.

얘기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재즈를 예로 보자.


미국에서 발생한 재즈를, 당시의 미국 남부나 뉴 올리언즈에서 태동, 점점 발전되어, 지금의 독립된 하나의 장르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만일, 재즈가 클래식처럼 맥이 끊겼다면, 오늘 날 재즈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당시, 그 지역에서 소수 그룹들끼리 영유하던 '소리'에 치부되었을 것이다.

마치, 우리네의 잃어 버린 소리를 찾아서에서나 들어 볼 수 있던 노인들의 옛날 소리처럼.

그런데, 재즈는 꾸준히 여러 아티스트와 수요자에 의해 퍼지면서 발전되고, 이제는 애시드니, 스윙이니, 악풍적, 지역적 구분의 하위 장르까지 가지가 열릴 정도로, 대중 음악의 큰 장르군을 형성하고 있다.


클래식도 그 당시의 역사적 음악 형태로 치부할 거면, 그냥 지금처럼 클래식을 소비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음악이 대체할 수 있는 부분을 아직도 클래식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클래식에 미련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클래식의 수요자들은 클래식이 죽었다는 평을 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현대 대중음악을 들으면서도, 클래식만큼 진중하고 품격있는 음악을 찾기 어렵다.


그 때 중세의 유럽 음악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전 세계 수요자를 위한 이 시대의 클래식이 나와 줘야 하는데, 바흐, 베토벤의 그림자에서 벗어 나질 못 하고 있다.

훌륭한 클래식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은 좋은데, 그 위의 새로운 시도와 창의적인 접근을 못 하게 막는 것은 아닌가, 염려스럽기도 하다.

만일, 내가 아까 지적한 현 대중음악이 대체할 수 없는 음악적 요소를, 클래식이 아닌, 기존 대중음악 영역 내에서 누군가 제시할 수 있다면, 클래식은 죽었다 살았다를 논할 필요 없이, 당장에 얼마든지 사라져도 무방하다.

누구라도 좋다.


글을 마치면서, 클래식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중세시대 유럽 음악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음악을 전공한 연주자, 지휘자에 의해 꾸준히 공연, 녹음되어 지고, 이를 소비하는 층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멀리 볼 것 없이 우리 대중음악만 보더라도, 단 몇 달동안 소비되어 지다 잊혀지는 유행가에 비하면, 얼마나 월등한 수명을 보여 주고 있는가 말이다.

코 앞의 수익을 위해 프로젝트 성으로 결성되어 앨범 한 장 내고 사라 지는 가수들, 그리고 버려지는 CD, 테이프들, 반면, 클래식 음악가는 그들의 생가와 박물관을 건립하고, 그들의 악보는 인류의 보물처럼 간직되어 지고 있다.

시대적으로 따지면, 잊혀져도 한참 전에 잊혀져야 하는 그들인데 말이다.

그만큼 클래식 음악은 위대한 걸작이다.

하지만, 그 수명이 다 했다.

왜? 클래식은 죽었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우리가 몸소 클래식에 사형을 언도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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