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은 피고인을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견 보기에 형법의 궁극적 귀결은 유, 무죄 여부를 가르고, 거기서 유죄에 해당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어느 정도 처하는 것이 합리적이냐에 귀결되는 듯 보인다.
그렇지 않다.
형법이 존재하는 본질적 목적은, 피고인을 처벌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피고인을 처벌함으로써, 다른 잠재적 범죄자를 예방하는 데 있다.
처벌은 그 자체로 어떤 사회적 복구 기능을 하지 못 한다.
물론, 처벌을 통해 피해자에게 간접적 만족을 줄 수도 있지만, 그 것은 피해자의 피해에 대한 피고인에게 보복을 가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형법은 이미 발생된 범죄에 대한 사후적 처리일 뿐, 형법의 범죄 억제에 성공하지 못 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러서 처벌을 주었다면, 그 자체가 형법이 잘 기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형법이 본래 목적하고 있던 그 범죄를 막지 못 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죄형법정주의'가 왜 형법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가.
억울하게 과도한 처벌을 내려서도 안 되겠지만,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후 보충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형법인 것이지, 어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착각이다.
형법이 많아 질 수록, 처벌 형량이 강할 수록, 그만큼 세상의 무질서가 난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모두가 서로 믿고 도우며 산다면 참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점점 법이 복잡해 지고, 형량도 강해진다.
국가가 국민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그마만치 손실이기도 하다.
세금을 들여서 수형소를 운영해야 하고, 교도관, 검찰, 법원, 경찰 월급을 줘야 하고, 국가가 벌금을 거두어 들인들, 그 것을 또 어차피 사법기관 예산에 써야 한다.
국민 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꽤 많은 예산이 쓰이고, 처벌 받은 국민은 그마만치 사회, 경제활동 또한 제약이 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이렇게도 손실, 저렇게도 손실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선량해 져서 범죄가 다 사라진다면, 그래서 법원, 경찰, 검찰에 세금이 쓰이지 않고, 발전적 예산에 쓰인다면.
우리 나라는 현저히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
그럼 피고인은 "그럼 나는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겠네?"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내가 처벌을 받는 본보기로 다른 범죄가 그나마 억제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비록 형법이 피고인 한 사람을 처벌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아니할 지라도, 다른 잠재적 범죄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이런 본보기가 된다는 공포심을 주기 때문에, 피고인이 처벌을 받아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
즉, 내가 지은 죄라서 내 벌을 받는다가 아니라, 내가 벌을 받음으로써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누군가를 방지한다는 것이다.
그 것이 형법 고유의 기능이며, 본래적 목적이다.
형법은 처벌로 다른 예비 범죄의 사전 발생을 억제하는 데 있지, 단순히 그 피고인 한 명을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정말 형법이 그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복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형법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형법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최후 보충적 경고 수단인 것이지, 처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