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선의 형법론

by 속선

형법은 피고인을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견 보기에 형법의 궁극적 귀결은 유, 무죄 여부를 가르고, 거기서 유죄에 해당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어느 정도 처하는 것이 합리적이냐에 귀결되는 듯 보인다.

그렇지 않다.


형법이 존재하는 본질적 목적은, 피고인을 처벌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피고인을 처벌함으로써, 다른 잠재적 범죄자를 예방하는 데 있다.

처벌은 그 자체로 어떤 사회적 복구 기능을 하지 못 한다.

물론, 처벌을 통해 피해자에게 간접적 만족을 줄 수도 있지만, 그 것은 피해자의 피해에 대한 피고인에게 보복을 가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형법은 이미 발생된 범죄에 대한 사후적 처리일 뿐, 형법의 범죄 억제에 성공하지 못 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러서 처벌을 주었다면, 그 자체가 형법이 잘 기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형법이 본래 목적하고 있던 그 범죄를 막지 못 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죄형법정주의'가 왜 형법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가.

억울하게 과도한 처벌을 내려서도 안 되겠지만,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후 보충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형법인 것이지, 어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면, 그 것은 착각이다.


형법이 많아 질 수록, 처벌 형량이 강할 수록, 그만큼 세상의 무질서가 난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모두가 서로 믿고 도우며 산다면 참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점점 법이 복잡해 지고, 형량도 강해진다.


국가가 국민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그마만치 손실이기도 하다.

세금을 들여서 수형소를 운영해야 하고, 교도관, 검찰, 법원, 경찰 월급을 줘야 하고, 국가가 벌금을 거두어 들인들, 그 것을 또 어차피 사법기관 예산에 써야 한다.

국민 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꽤 많은 예산이 쓰이고, 처벌 받은 국민은 그마만치 사회, 경제활동 또한 제약이 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이렇게도 손실, 저렇게도 손실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선량해 져서 범죄가 다 사라진다면, 그래서 법원, 경찰, 검찰에 세금이 쓰이지 않고, 발전적 예산에 쓰인다면.

우리 나라는 현저히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


그럼 피고인은 "그럼 나는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겠네?"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내가 처벌을 받는 본보기로 다른 범죄가 그나마 억제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비록 형법이 피고인 한 사람을 처벌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아니할 지라도, 다른 잠재적 범죄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이런 본보기가 된다는 공포심을 주기 때문에, 피고인이 처벌을 받아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

즉, 내가 지은 죄라서 내 벌을 받는다가 아니라, 내가 벌을 받음으로써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누군가를 방지한다는 것이다.

그 것이 형법 고유의 기능이며, 본래적 목적이다.


형법은 처벌로 다른 예비 범죄의 사전 발생을 억제하는 데 있지, 단순히 그 피고인 한 명을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정말 형법이 그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복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형법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형법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최후 보충적 경고 수단인 것이지, 처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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