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마 트리니티 RCA

by 속선

요르마 브랜드의 케이블만 벌써 2 개째이다.

우연한 기회에 새 제품 급을 파는 판매자를 와싸다에서 만났다.

원칙적으로 고가의 케이블은 번거롭더라도 직거래를 하는 편인데, 당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부득이 택배로 구입하였다.


내가 최초로 접한 요르마 케이블은 지금 메인 DAC에 물려 쓰고 있는 '오리고' 파워 케이블이다.

더운 여름이었는데, 멀리 고속버스타고 수원까지 가서 거래를 하였다.

가격도 중고니까 그 정도였지, 정가는 400만 원이다.

나에게 요르마는 그만큼 예전부터 '돈이 없어 못 사는', 하여튼 그렇게 탐을 내던 브랜드였다.


지금 구입한 트리니티 급 RCA는 오리고보다 급이 많이 떨어 진다.

그럼에도 "좋다."

요르마는 제일 상급의 스테이트먼트, 프라임, 오리고, 유니티, 듀얼리티, 트리니티 순으로 등급이 매겨져 있다.

트리니티는 그 중에서 가장 급이 낮은, 엔트리 급 라인이다.

최근에는 최상급 스테이트먼트보다 더 높은 '파라곤'이란 파워 케이블 전용 라인이 출시된 모양이다.

그 비싸다는 스테이트먼트보다 급이 높다니, 가격은 차라리 알기를 원치 않는다.


요르마를 두 개째 들이면서 느껴본 요르마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8N의 순도를 기반으로 해서 세밀한 해상도가 참 일품이다.

나름 이런저런 브랜드의 케이블들을 접해 봤는데, 의외로 가장 기본적 덕목이랄 수 있는 해상도에 있어 부족함이 있는 브랜드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해상도란 것은 가장 기본적 덕목이지만, 그 기본을 구현해 내기란 쉽지 않은 모양인가 보다.

동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차례 정련을 해야 하고, 그렇다면 제작 단가는 비싸게 시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브랜드이든지 순도와 해상도의 중요성을 알지만, 실제로 그 것을 제대로 구현해 내는 브랜드는 많이 없다.

요르마는 가장 엔트리인 트리니티도 기본 8N부터 시작한다.

어떤 급이라도 해상도는 기본적으로 먹고 들어간다.


둘 째, 케이블이 쏘지 않는다.

처음에 출력이 좋은 케이블은 교체할 때 느낌이 팍 올 정도로 체감효과가 크다.

처음 얼마간은 케이블 교체의 변화가 크다고 느끼며 감격해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듣기 부담스러워 진다.

분명 처음에는 좋았는데.

요르마는 기본적 성향이 절대 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요르마 케이블의 창업자인 스웨덴의 요르마 코스키의 인터뷰를 접해 봤는데, 아주 섬세하고 작은 부분까지 챙기는, 꼼꼼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제작자이자 창업자의 성향이 고스란히 케이블에도 구현돼 있다.

창업자는 몇 년 전에 작고하고, 회사는 자국 브랜드인 마르텐에 넘겨 졌는데, 여전히 수작업을 고수하고 품질도 일관되게 잘 운영하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어필하거나, 일체 내세우지 않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몫만 묵묵히 해내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본 적을.

옷을 화려하게 입지도, 과하게 화장을 하거나 말재주를 부리면서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과 전혀 상반된.

꾸미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지극히 평범한 데서 매력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이상하다? 그냥 너무 평범한 사람인데."하면서 내 자신이 의아스럽다.


요르마가 지금 그런 케이블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나 개성을 어필하려고 하지 않는, 굉장히 편안하고 여성스럽고 섬세하게 다가온다.

과하게 자신을 어필하는 케이블은 처음 얼마간은 좋을 지 몰라도, 머지않아 식상하고 부담스럽다.

사람이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거나, 멀리하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처럼.

요르마는 들을 때마다 소리에서 은은한 윤기가 느껴지고, '자연스럽고 편하다.', 케이블이 쏘지 않아 부담이 없다는 데서 매우 큰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케이블도 결국 오디오의 한 구성품이고, 단순 중립적 신호전달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결국 궁극적으로 청자가 듣기 원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는 철학이 없지 않고서야, 이런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왜 요르마 케이블이 그렇게 비싸고, 호평받는 지의 진가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고가 브랜드들이 첨단적 테크놀로지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화려하고 멋진 외양을 자랑하는 서양적 미인상이라면, 요르마는 수수하면서도 항상 곁에 있으면 편하고,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은근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동양 미인같다고 평하고 싶다.

직접 들어 봐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참으로 묘한 브랜드이다.


나에게 있어, 더 이상의 케이블 선택의 방황은 끝났다.

물론, 최하급인 트리니티로는 조금 심심한 감이 없지는 않다.

내가 봤을 땐, 적어도 유니티나 오리고 급 정도는 돼야 요르마의 요물스런 진정한 퍼포먼스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트리니티 조차 타 중저가 브랜드의 플래그쉽이나 레퍼런스 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기본부터 고순도와 차폐, 고급 단자를 채용했으므로 근본부터 다르게 시작한다.

사실, 트리니티만 해도 실제 가격이나 퍼포먼스 측면에서는 정말 타 브랜드의 중급, 중상급에 해당하기 때문에, 트리니티만 해도 참 좋다.

조금 경제적 여건만 된다면, 유니티나 오리고를 추천하고 싶다.

오리고만 되면, 실질적으로 더 이상의 퍼포먼스는 욕심 안 들 정도로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좋다.

그런데, 보다 수수하고 차분한 소리를 원한다면, 오히려 상급보다는 트리니티나 듀얼리티 급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쎄, 아마 나에게 케이블에 관해 타 브랜드를 평가할 일은 아마 거의 없을 듯 싶다.

이제, 요르마 말고는 눈에 밟히는 게 없으니까.

RCA 말고도 트리니티 급에서 파워 케이블도 매물이 나온 게 있는데, 그 마저도 돈이 부족해서 못 산 게 한스럽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나는 오래 전부터 부어 왔던 내 신탁연금을 손해보고 깰 지도 모르겠다.

만기까지 그냥 놔 두기엔, 또다른 요르마 케이블이 자꾸 내 눈에 밟힌다.

눈을 감아도 소용없다.

매거진의 이전글모든 LP가 아날로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