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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리스어로 말할 수 있어요!"

그리스어 어학당 초급반 수료

by 그릭아낙

"Μπορώ να μιλάω ελληνικά!"

(보로 나 밀라오 엘리니까)

"이제 그리스어로 말할 수 있어요!"

아테네 대학교 어학당 건물
어학당 가는 길에 지나는 아테네 대학교 철학과 건물 (Φιλοσοφική Σχολή-필로소피키 스홀리)

내 발로 내가 원하는 걸 찾아다니지 않으면, 원하는 정보를 제 때 찾을 수 없다. 그리스어 어학당을 찾는 일도 그렇다. 그리스 사람이라면 어느 대학교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친다더라 쯤은 알줄알았다. 그런데 그런학교도 잘없고 있다고 해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 혼자 찾아다녔다. 정보를 찾으면 셰프에게 전화해달라고 졸랐다. 주변에서는 그리스어를 배우는 사람이 별로 없어 사립학원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난 찾아다녔다. 정 안되면, 언어교환을 해줄 친구라도 찾고자 했다. 운이 좋게도 아테네 대학교 어학당을 찾아냈다. 아테네에서 제일가는 아테네 대학교에 소속된 어학당이다. 다행히도 아직 등록기간이 남아 있었다. 한국어 어학당에 등록하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대학교 어학당은 기본 학력 증명서를 요구한다. 최소한 교등학교를 졸업해야지만, 그리스어 어학당에 등록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최종학력은 석사. 한국에서 아포스티유를 해오지 않아 그리스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대신, 한국에서 대학원을 등록할 때 제출해야 했던 프랑스 학위 아포스티유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제출했다. 그리고 250유로 (약 35만 원)를 송금하면 등록 완료.


수업이 시작되기 이틀 전, 레벨테스트를 봐야 한다. 사립학원에서 이주간 배운 것들을 총동원해서 두 편의 에세이를 섰고, 250문제를 풀었다. 첫 50문제는 거뜬히 해냈다. 뒷 번호로 넘어갈수록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 아는 단어를 골라 찍고 나왔다.


첫 수업이 시작되던 날 게시판에 붙어있는 반 배정표. 내가 공부할 곳은 207호. 다시 그리스어를 배울 수 있는 게 신나서 들떠 있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리스어로 내게 말을 건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이제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중상급 수준의 학생들을 위한 수업이라는 걸 깨달았다. 난 이제 겨우 '내 이름은 솔입니다'를 말할 수 있는 수준인데......


쉬는 시간,

나: 선생님, 저 이 수업이 버거운데, 다른 반으로 다시 배정해 줄 수 있을까요?

강사: 왜요? 에세이를 정말 잘 썼어요. 이 반에 남아도 될 것 같은데.

나: 아니요, 저 수업을 하나도 못 알아 들었어요.

강사: 그럼 중급반으로 갈래요?

나: 아니요, 초급반으로 갈게요.

강사: 초급반이요? 그리스어를 배운 지 얼마나 됐나요?

나: 이 주요.

강사: 아, 그럼 초급반으로 가야겠네요.


내가 굳이 못 알아듣는데도 끝까지 강사는 그리스어로 이야기한다. 그리스어를 배우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강사들은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어반 영어반 섞어가며 나의 의견을 어필했다. 기분은 참 좋다. 내가 에세이를 잘 썼다니.

sticker sticker

그런데 글쓰기만 잘하면 뭐하나. 일상에 필요한 건 글쓰기가 아니라 듣고 말하기인데.


A2 초급반 204호, 그리스의 교실에는 항상 그리스지도가 걸려있다.

그래서 난 다시 초급반으로 배정받고 204호로 향했다. 그래, 이게 딱 내 수준이지. 이곳에서 나는 집안 곳곳에 놓인 가구, 물건 등의 이름을 포함해 그리스에 살면서 꼭 알아야 할 단어 '파업(απεργία, 아페르기아)'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어휘를 익혔다. 아직 과거형으로 이야기는 못하지만, 이제 난 가게에 가서 혼자 물건을 살 수 있고, 길을 잃으면 길도 물을 수 있을 만큼 그리스어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한 달 동안 매주 5일 오전 네 시간을 그리스어에 온전히 부은 시간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미 각지에서 그리스로 이주 온 뮤지션과 댄서들.

벨리댄스를 선보이고 있는 헬렌.

헬렌과 A2 204호 같은 반 친구들
브리트집에 초대되어 함께 찍은 사진.

필자가 공부했던 A2 204호에서는 16명의 학생들이 함께 공부했다. 모두가 다 다른 국가 출신이다. 터키, 파나마, 스웨덴, 콩고, 프랑스, 브라질, 카자흐스탄, 알베니아, 루마니아, 독일, 조지아, 팔레스타인, 중국, 이탈리아, 한국, 이란! 굉장하다! 왜 그리스어를 배우려고 하는지 참 궁금하다. 필자처럼 결혼해 정착한 사람도 있고, 부모 중 한 사람이 그리스 출신이어서 배우고자 하는 학생도 있고, 다른 유럽 국가보다 인종차별이 없어 이주한 사람도 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삶에 열정적이다. 이들을 만난 건 이 수업에서 얻은 또 다른 수확이다.


얼마나 멋진가. 은퇴한 나이지만 멋진 패션감각을 지닌 스웨덴 여성 브리트, 로마에 가면 머물도록 허락해준 긍정소녀 클라우디아, 그리스 정교 목사가 되고자 하는 루마니아 파파, 7살 때부터 춤을 배워 지금은 춤 선생님이 된 브라질 헬렌, 부동산 중개사로 일하다 은퇴하고 지금은 그리스 바다를 항해하며 살고 있는 독일인 페트로....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기에는 절대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다.


앞으로 두 달 반 동안 방학이다. 그동안 배운 그리스어를 복습하고, 종종 친구들을 만나 그리스어를 연습할 계획이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1-3시간이면 닿는 곳에 있기에 곧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오늘도 웃으며 헤어진다.


다음 학기는 10월에 시작한다. 글뿐만 아니라 듣기와 말하기 실력을 키워서 당당하게 중급반으로 갈 수 있도록 도전!


잊지 말자! "Si tu veux, tu peux!" "원하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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