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없을 시월
한참을 뛰어 놀다 손에 묻은 흙을 바지에 쓱쓱 닦아내며 문을 열었다. 철문이 요란한 소리로 열리면 좁은 마당에서 팥 삶는 냄새가 가득했다. 시월 말, 우리 집 좁은 마당 풍경은 내가 일곱 살이 되기까지 그랬었다. 할머니가 솥 근처에서 팥이 잘 익는지 살피고, 엄마는 빻아온 수수를 동글동글 빚었다. 쌀쌀한 기운이 도는 시월 말이어도 그 날이면 마당은 가마솥 열기 덕분에 훈훈했다. 난 손을 씻지도 않고 엄마와 할머니 곁에 앉아 손장난을 하곤 했다. 밖에서 신나게 놀았어도 마음을 온전히 편안하게 내려놓고 논다는 건 또 얼마나 행복한지 일이었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팥이 다 삶아지면 건져내어 물기를 빼고 소쿠리에 넓게 펼쳐 식혔다. 그 틈을 타서 팥을 서너 개 주워 먹으면 뜨거운 팥의 사근사근한 식감이 재밌었다. 참 달고 정겨운 맛이었다. 팥은 가을 추위에 금세 식었다. 뜨거운 솥 곁에서 양 볼이 소녀처럼 붉어진 할머니가 이내 팥을 절구로 찧기 시작했다. 폭 삶아진 팥은 한 번의 절구질에도 포슬포슬 가루가 되었다. 팥의 모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팥을 찧고 나면 약간의 설탕을 팥 위에 뿌렸다. 그 사이 엄마는 수수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새알심만한 크기로 동그랗게 반죽을 빚었다. 동글동글한 알맹이들이 뜨거운 물에 퐁당, 떨어졌다가 다시 떠올랐다. 엄마는 동동 떠오른 새알심을 건져내어 둥근 사기그릇에 담았다. 하얀 사기그릇에 뽀얗게 익은 새알심은 옹기종기 모여 김을 모락모락 피워냈다. 할머니는 널따란 쟁반에 팥을 깔고 그 위로 수수 새알심을 동그르르 굴렸다.
그때쯤 되면 나는 마당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손을 씻고 물기를 옷에 쓱쓱 닦아내며 평상에 앉았다. 수수팥떡은 손 위에 올려놓고 장난을 치다가 입안으로 쏙, 넣는 재미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할머니가 웃으면 엄마도 웃고, 등에 업힌 동생도 까르르거렸다. 나는 수수팥떡을 먹는 날에 태어났구나 생각했었다. 생일 때마다 할머니와 엄마가 만들어주셨던 수수팥떡을 생각하면 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사랑이기에 그렇게 따뜻한 온도를 지니는 것인지 궁금했다.
우리가 평상에 앉아 떡을 먹다 보면 온 동네가 밥 짓는 냄새로 자욱한 저녁때가 되곤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따로 담아 놓은 수수팥떡을 들고 옆집에서 그 다음 옆집으로, 다니며 떡을 나누어주고 오셨다. 엄마는 내 등을 쓸어주었다. 맛있게 먹은 생일 떡, 소화 잘 돼서 무럭무럭 크라고. 엄마가 두드려주던 등을 대신해 이제는 이따금 내가 나의 가슴을 두드린다. 그것이 음식이든, 쌓인 고민들이 되었든지, 살아가는 날들 소화가 잘 되기를 바라면서. 수수팥떡은 어르신들이 어린 아이의 무병장수와 액운을 막는다는 의미로 10살 때까지 생일마다 해 먹이는 떡이라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릴 때 뛰어 놀던 동네 길이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이웃들이 늘어나는 동안 엄마만은 여전하다는 것이 참 신비롭다. 마음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에 따뜻한 바람이 꾸준히 부는 느낌이다. 이 따뜻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분다는 일에 신비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가다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엄마를 지나친 적이 있다. 엄마가 아니라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던 순간에 이 신비로움은 더 커졌었다.
어린 동생을 포대기에 감싸 업고 부엌을 오가던 엄마와 평상에서 팥을 찧던 할머니 모습. 그 풍경이 아직 생생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찬 공기와 높은 하늘. 동네 어귀에서 들려오던 강아지 짖는 소리, 동생의 칭얼대는 소리. 그때, 늦가을의 포근한 마당 풍경을 떠올리면 내 평생 그런 호사는 이제 다시없을 것만 같다. 수수팥떡은 네 살부터 일곱 살까지 먹었다. 팥 삶는 냄새가 마당에서 끊긴 건 할머니가 돌아가신 해부터였으니까, 그 호사는 이미 오래 전에 다시없을 추억 거리로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