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과거에 생겨난 분화구가 지금을 사는 나에게 무엇이 고민이냐 물었다
<내이름은 김삼순>의 여주인공, 삼순이는 마지막 회에서 눈이 쌓인 한라산을 홀로 오른다. 드라마의 마지막이 그렇듯 남자주인공이 여자를 찾아 한라산으로 오고, 두 사람은 눈을 맞으며 사랑을 확인한다. 그 장면이 무척 기억에 남아서 나도 언젠가는 홀로 오르리라 생각했었다. 이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진 건 몇 년을 더 보낸 후 어느 여름날이었다.
전날 숙소에서 챙겨둔 배낭을 메고, 새벽에 성판악으로 향했다. 관음사 코스는 새벽부터 산행에 나선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친한 친구는 겨울에 한라산을 오르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어쩌면 나에게도 친구처럼 어떤 인연을 만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고 산행을 시작했다. 나의 흑심 가득한 산행은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찾아온 체력적인 한계로 현실을 바라보게 했다. 오늘 안에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로 산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모든 망상이 뚝, 멈추고 오르는 일에 묵묵히 집중해야 했다. 머리를 가득 메웠던 잡된 생각들이 사라지자 주변 풀숲에서 동물이 내는 소리, 바람이 주는 시원함, 고도가 높아지면서 몸에 찾아오는 압력 등이 느껴졌다.
‘내가 지금 어떤 상상 속을 걷는 것이 아니라 여름의 산을 오르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여름이 길러낸 무성한 초록들을 스쳐가면서 나는 내게 주어진 어려움과 기쁨을 번갈아 생각했다. 한 걸음 씩 내딛을 때마다 어려운 일 하나, 기쁜 일 하나씩 균등하게 분배해봤다. 걸음을 내딛다 보니 삶의 무게가 참 균형 있게 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게가 동일하게 반반 나뉘어져 나의 어려움도 기쁨도 내 삶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날씨가 좋은 여름날 한라산을 오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 되었다.
산행의 기쁨을 느낀 후 정상까지는 무려 세 시간여를 더 올라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삼순이의 로맨스를 꿈꾸며 산을 오른 생각이 무색해질 정도로 지쳐갔다. 정상에 가까워져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여름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내려가서 추워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스쳐가는 사람들이 힘을 내라고, 격려를 건네 오기 시작했다. 정상을 찍고 하산하는 사람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며 기운 내라는 말을 전했다. 여기까지 올라온 이들과 전우애 같은 마음을 나누며 계속해서 올랐다. 그리고 백록담을 코앞에 뒀을 때, 산길이 급격한 경사를 이뤘다. 나는 겁이 많아서 그 지점에선 거의 엎드려 오르다시피 했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암벽등반을 하듯 백록담을 향해 기어갔다.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한라산 정상에 오르자 다행히 날이 좋아서 백록담이 훤히 보였다. 발 아래 펼쳐진 1만 9천 년 전 형성된 거대한 분화구. 분화구를 가득 채운 물 위로 하늘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시야 아래, 백록담 분화구에 담긴 하늘과 머리에 맞닿은 하늘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헷갈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먼 과거에 생겨난 분화구가 지금을 사는 나에게 무엇이 고민이냐고,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낸 백록담의 폭발과 이후에 백록담이 견뎌낸 긴 시간을 떠올리자 머릿속에서 이런 대답이 절로 떠올랐다.
‘아니요. 내 고민은 별 게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이 분화구를 보기 위해선 험한 산길을 오래오래 올라야만 가능하다. 고된 산행은 절로 겸손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하는 준비 단계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가진 고민들은 삶 전체를 두고 보면 얼룩 같은 거였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고 마는 작은 일. 삼순이가 한라산 정상에 오르고 나서야 사랑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정해진 하산 시간이 되어가자 빗줄기도 굵어졌다. 나는 올라온 길을 다시 조심조심 내려갔다. 그런데 갑작스레 무릎에 고통이 찾아와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간다고 한다. 움직이지 못하고 쩔쩔매는 나를 보고 주변에서 ‘컵라면 열차’를 타라고 했다. 한라산 매점으로 컵라면을 태우고 오르내리는 자그마한 컨베이어 같은 것이 있으니 타라는 거였다. 매점으로 가니 나처럼 무리한 산행으로 움직이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고된 산행으로 체력이 부친 몇몇과 함께 컵라면 열차를 타고 한라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해는 이미 넘어가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새벽에 오른 산행은 어둑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병원을 가니 무릎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주사기로 무릎에 찬 물을 빼면서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높은 산을 기초 체력도 안 기르고 올랐느냐”며 혀를 찼다. 나는 그 말에 “선생님, 한라산 너무 예쁘더라고요.”라는 동문서답을 했다. 이런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가벼운 마음이 된 대신, 무릎에 물을 채우고 온 거라고 혼자 뿌듯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