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Feb 09. 2017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혹시 ‘싸이월드’를 기억하시는가. 이제는 그 영향력을 거의 다 잃어버렸지만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의 흑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그곳. 나는 지질하기 그지없는 그 공간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싸이월드에 들어가 다이어리를 확인한다. 싸이월드에서는 심지어 정확히 몇 년 전 오늘의 내가 얼마나 오글거렸는지, ‘today’s history’라는 친절한 기능을 통해 보여 주기도 한다.

  작년 7월 말경이었다. 나는 무심코 싸이월드에 들어갔다가 정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때로부터 정확히 6년 전, 그러니까 2010년 7월 24일에 나는 다음과 같은 딱 한 문장을 다이어리에 남겨 놓았던 것이다.

내려놓으면 편해질까?

  대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스물한 살의 나는, 무언가를 내려놓고 편해지고 싶었을 만큼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리 힘들었나 싶지만 어쨌든. 그리고 이 글을 읽은 6년 뒤의 나, 그러니까 2016년 7월 24일을 살아가고 있던 나 역시 소름 돋게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려놓으면 정말로 편해질까 하고.

  사람은 예전에 했던 고민을 약간의 변주만 거치며 계속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고민을 하는 ‘주체’‘나’가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사람과 사랑, 이렇게 살아 있는 것들에게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살아 움직이는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번뇌를 경험하는 동시에 가장 큰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이나 돈이, 어떤 사람에게는 재미와 즐거움이 그러한 대상일 것이다.

  결국 나라는 인간의 성격과 기질이 그다지 바뀌지 않으므로 사람은 예전에 하던 고민을 그대로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슬퍼하지 말자. ‘아직도’ 똑같은 문제로 힘들어 한다는 것은,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 포기하거나 편리하게 타협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나를 아는 동아리 선배 중 한 명은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항상 힘들어 했어.”

  의아했다.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힘들지 않은 시간도 많았는데, 왜 그 선배는 나를 그렇게 기억하는 것일까? 보다 솔직하게는 어쩐지 매사에 부정적이고 지쳐 있는 사람으로 보인 듯해서 어쩐지 억울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 성격 때문이었다. 나는 내 고민이나 걱정거리를 남들에게 거리낌 없이 말하는 편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주 힘들어 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밖에.

그랬다. 나는 원래 생각이 많다. 매사에 잔걱정도 많다. 스스로에게 세워 놓은 규칙이 많아 거기에 어긋나면 자책하고 반성한 적도 많다. 한마디로 인생을 피곤하게 살기에 딱 좋은 성격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라는 인간이 그냥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나라는 사람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해진다. 매 순간 남들보다 더 자주 힘들면 또 어떤가. 어쨌든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왜 이런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하고 나를 탓하는 대신, ‘나는 이런 인간이니까 무슨 일을 하든, 어떻게 살아가든 좀 더 꼼꼼하고 조심성 있게 살 수 있겠군.’ 하고 합리화하자. 그 편이 이렇게 생겨 먹은 나에게 좀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러고 나니 스트레스도 줄어들었다. 적어도 왜 나는 남들보다 사소한 것들에 더 많이 힘들어 하는지 고민할 필요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방법인가!




  우리는 너덧 음절의 짧은 말로 서로 간의 안부를 묻는다. 너무 쉽게, 너무 간단하게.

  “잘 지내지?”

  “요즘 괜찮지?”

  “별일 없지?”

  나는 가끔(아니 사실은 종종) 이런 안부 인사가 불편하다. 어쩐지 나는 잘 지내야만 하고, 괜찮아야만 하고, 별일이 없어야만 할 것 같이 느껴져서이다. 안부 인사를 가장한 무언의 압박인 듯하여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때때로 반문하고 싶다. 왜 꼭 괜찮아야 하냐고, 왜 괜찮지 않으면 안 되냐고.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삶이 제일 힘겹다.

객관적인 힘듦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즘 ‘금수저’ ‘흙수저’니 하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만, 수저라는 말 앞에 붙어 있는 ‘금’‘흙’이라는 말 역시도 그 힘듦의 온당한 무게를 나타내 주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내 삶의 무게를 마음대로 재단할 수 없다.

  기쁨과 슬픔을 비롯한 온갖 감정을 주체적으로 겪어 볼 수 있는 삶이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의 삶 하나뿐이다. 나를 낳고 키워 주신 부모님도, 같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형제자매도, 척하면 척 나를 알아주는 단짝도 내 삶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당연하다. 어느 누구도 내가 되어 내 삶의 무게를 짊어져 볼 수 없으며, 그 누군가에게는 그 자신의 삶이 가장 힘든 법이다. 누군가의 삶이 객관적으로 나보다 아주 많이 힘들어 보이는 상황에서조차, 내 삶의 작은 생채기 하나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

삶이란 이렇듯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러니 힘들다고 느껴지는 어느 날이면 나를 위로해 주자.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지 않아도 정말로 괜찮다고. 나의 오늘 하루는 내 인생에서 처음이므로 낯설고 어렵고 힘든 게 당연하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