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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Feb 16. 2017

드라마를 본다는 것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은 예능 한 편을 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나는 드라마를 꽤나 좋아하지만, 가급적이면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드라마를 보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까 봐 지레 겁을 먹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구태여 함께하고 싶지 않은 몇몇 인물들의 삶까지도 참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피해보려고 관심 없는 척을 하지만, 기어코 나를 텔레비전(이 없는 자취생이므로 정확하게는 노트북) 앞으로 끌어당기는 드라마들이 있다. 그런 드라마들은 때때로 등장인물의 내레이션이나 대사를 통해서, 때때로 드라마 작가의 이름 그 자체만으로 나를 ‘꽂히게’ 만든다.

  2015년 여름에는 여주인공의 내레이션*에 꽂혀서,

설레는 그 순간들이 진심이었다고 믿었다.
나를 설레게 한 것들이 가짜였다는 것보다 더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한순간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들켜 버렸다는 것이다.

  2015년 겨울에는 헤어짐의 이유를 묻는 남자에게 대꾸하는 여주인공의 대사**에 꽂혀서,

항상 시간이 없다고 할 때 알아들었어야 했어.
선배는 바쁜 게 아니라 나보다 다른 게 더 좋았던 거야.
아픈 날 혼자 내버려 뒀을 때도 알아들었어야 했어.
내가 아픈 걸 몰랐던 게 아니라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였어.
나는 내가 너무 시시해서 못 참겠어.
전화기 붙잡고 기다리고, 연락 안 온다고 화내고, 선배가 나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버려야지 작전이나 짜고.

  나는 소위 말하는 ‘정주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혹시 한눈에 무슨 드라마인지 알아차리신 분이라면 나와 감성 코드가 비슷한 시청각 동지가 분명하리라! 반갑소, 동지여!     




  그렇다면 나는 왜 위와 같은 말들에 꽂힌 것일까? 아마도 그 짧은 말 속에서 내 경험의 일부를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여주인공의 내레이션을 들으며 그 옛날 어항 안에서 신나게 헤엄치던 나라는 물고기 한 마리를 떠올렸으며, 선배 운운하는 여주인공의 대사를 들으며 ‘왜 하필 호칭도 선배인 걸까’ 하고 생각했었다. 나 역시 선배였던 누군가와 만난 적이 있으며, 그에게 비슷한 유형의 서운함을 느껴 보았고, 그렇게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드라마와 달리 나는 저런 얘기를 솔직하게 그놈의 선배에게 하지 못했다는 것뿐.

  사람은 결국 자기가 겪은 만큼만 볼 수 있는 법이다.

심지어 드라마를 볼 때도 나와 비슷한 캐릭터에 더 마음이 쓰이고, 내 경험과 유사한 사건에 더 공감하게 되지 않던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어쩌면 내가 타인에게 애정과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들어 주는 것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공감도 지나친 알은체도 현실에서는 전혀 드라마틱한 결말을 가져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다른 버릇도 있다. 첫 회부터 챙겨 본 드라마가 아니라면 해피엔딩을 향한 조짐이 보이는 시점에서야 본 방송을 사수한다. 그 전까지는 인터넷 기사를 통해 드라마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매회 결론만 확인할 뿐이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딱 하나,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대부분은 주인공 커플)이 고생하고 엇갈리는 것이 보기 싫어서이다. 그들이 슬플 때 같이 슬프고, 힘들 때 같이 힘들어 하는 이 죽일 놈의 공감 능력이라니!

  그래서일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 중 하나인 ⟨그들이 사는 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인공 커플이 갈등을 겪는 중반부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처음에는 건너뛰었다가, 마음의 준비가 된 다음에야 빼놓았던 부분을 메워 가며 보았다.

  말로는 이 죽일 놈의 공감 능력이라고 툴툴거렸지만, 사실 좋은 점도 많다. 덕분에 드라마 인물의 대사 하나하나, 연출된 장면 하나하나에서도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하물며 드라마도 저런데 우리네 삶이란 오죽할까’ 하는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좋지 아니한가!

  자, 이쯤에서 앞서 언급한 두 드라마의 정체를 공개하도록 하겠다. 

* 하지원, 이진욱이 주연한 드라마 ⟨너를 사랑한 시간⟩. 당시 하지원의 머리 스타일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섣불리 시도하지는 마시길, “고객님, 이건 고데기입니다”.
** 정려원, 이동욱이 주연한 드라마 ⟨풍선껌⟩. 시청률이 크게 높지는 않았지만 배우 정려원과 이동욱(요즘 저승이로 주가가 한껏 치솟은 그분)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몇몇 장면은 마치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같은 분위기를 풍길 만큼 연출도 좋았다.


⟨풍선껌⟩의 여주인공은 ‘행아(정려원)’라는 독특한 이름의 소유자였는데, 그 이름에는 ‘행복한 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올해에는 드라마를 보며 많이도 울고 웃는 ‘공감 능력자(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들이 조금 더 ‘행아스럽게’, 조금 더 ‘주인공답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누가 뭐래도 내 인생만큼 극적인 드라마는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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