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물이 많다.
몇 년 뒤면 서른 살이 되는 나이인데도 여전히 잘 운다. 혼나서 울고, 감동해서 울고,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운다. 어쩌면 ‘운다’라는 말보다 ‘울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내 의지가 눈물샘에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눈가에는 물기가 차오르고,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은 툭 하고 떨어져 버린다. 내게 있어 눈물을 만들어 내는 일련의 신체 기관들은 모두 ‘불수의근’*이다.
*의지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울어! 뚝 안 그쳐?”와 같은 부모님의 꾸중이 가장 억울했다. 내가 울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닌 것처럼 그치고 싶다고 그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후 관계를 따지자면 부모님이 엄하게 혼내셨기 때문에 울게 된 것인데, 거기에다 우는 것 가지고도 또 혼을 내시다니. 서럽기 그지없었다.
어제도 아버지( 사실은 아빠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지만)에게 비슷한 내용의 잔소리를 들었다.
“아직도 그렇게 잘 울면 어떡하냐! 남들이 너를 얼마나 약하게 보겠니?”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의 원래 성격이 어떠하셨는지 점차 알아가게 되는데, 보다 보면 이렇게 잘 우는 것도 부모님을 닮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자. 내가 이렇게 많이 우는 것에는 부모님 책임도 있다!
2006년에 개봉된 ⟨로맨틱 홀리데이(원제: the Holiday)⟩라는 영화가 있다.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해서 족히 대여섯 번은 다시 본 몇 안 되는 영화이다. 여기에는 ‘아만다(카메론 디아즈)’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이혼을 목도한 아픔을 지니고 있다. 그때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린 바람에 이후에는 눈물이 메말라 버린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아만다는 동거하던 연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헤어진 이후에도,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지 아닌지에 집착하는 면모를 보인다. 아만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지극히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을 때나 선생님께 혼이 났을 때, 혹은 친구와 다투었을 때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가을동화⟩라는 작품을 시작으로 드라마 세계에 입문하면서는 슬픈 장면, 그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는 부분에서 감정을 이입하여 참 많이도 울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을 다룬 이야기에 반응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부모님이나 할머니와 관련된 내용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다. 흔히들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께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다.
사람은 자기가 겪은 만큼 공감할 수 있다.
아무리 평범한 일상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하루하루는 무수히 많은 인연과 일들이 엮여 완성된다. 그렇게 내가 공감할 수 있는 폭은 하루치만큼 넓어진다. 나만 해도 그렇다. 예전에는 공감하지 못했던 ‘작아진 아버지의 등’과 같은 문구를, 지금은 마냥 상투적이라고 비웃지 못한다. 그렇게 내가 울게 되는 이유 역시 하루치만큼 늘어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인 이상, 우리 모두의 눈물샘은 ‘항상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나는 여전히 잘 우는 내가 좋다.
운다는 것은 곧 무엇인가에 내 마음이 움직였다는 뜻이며, 동시에 무엇인가에 내가 공감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눈물은 그래도 ‘사랍답게’ 살고 있다는 따뜻한 증거가 되어 주기도 한다.
많이 우는 것이 뭐가 나쁜가? 그냥 툭 건드리면 눈물샘이 터지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정말 아버지의 말씀대로 눈물이 많으면 약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일까?
공적인 자리에서는 꿋꿋하게 내 삶을 잘 영위해 나가다가, 사적인 자리에서는 좀 울어도 되지 않을까. 눈물을 보여도 되는 사람 앞에서는 가끔, 아니 종종 울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노력해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불수의근’ 아닌가!
다시 ⟨로맨틱 홀리데이⟩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아만다는 결국 눈물을 흘리는 데 성공했을까? 궁금한 분은 직접 이 영화를 보시길 바란다. 단연코 어떠한 편집자보다도 가장 매력적이고 섹시한, 영국 악센트를 쓰는 ‘그레이엄(주드 로)’이란 인물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딜 가나 남성 편집자는 왜들 그렇게 멋지게 그려지는지, 세상에 그레이엄 같은 편집자가 어디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