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학년도의 끄트머리에
나에게는 '앓던 이'가 있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오랜 기간 치료를 거듭해 온 어떤 치아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런 치아가 '있었다'고 과거형으로 서술한 이유는, 이제는, 그 치아가 내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은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을 것이다. 다니던 영어학원 근처에 위치한 문방구에서 한동안 이런저런 사탕을 사서 입에 물고 귀가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이 주요한 요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비슷한 시기에 윗잇몸 쪽 맨 가운데의 두 앞니, 그 양옆에 붙어 있던 앞니들 두 개 모두에 신경 치료를 받아야 했던 것 같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직장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어떤 날은 남은 치료를 위해 방과 후 혼자 버스를 타고 경주 시내로 이동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파편처럼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그 과정이 나에게 마냥 수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 이후로 웬만하면 사탕을 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어느덧 포항에 있는 고등학교로 통학하는 고 3 수험생이 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중요하다던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중간의 어느 날, 초등학생 때 신경 치료를 받았던 앞니 중 한쪽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나는 잇몸을 절개하고 뿌리 쪽을 건드리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초등학교 때 내 이를 치료해 주신 치과 의사 선생님께서 때마침 그 무렵 포항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계셔서, 나는 다시금 같은 의사 선생님께 내 이를 맡겼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방과 후에 병원을 찾았고, 내가 너무 겁을 먹고 긴장을 했었던지 병원에 동행했던 엄마가 내 손을 잡아 주셨던 기억 또한 조각처럼 남아 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나는 내 윗잇몸에서 삐죽삐죽 삐져나와 있는 검은 실밥의 존재를 느끼며 다시 평소처럼 공부를 했고, 얼마 뒤 실밥을 뽑았고, 또 얼마 뒤에는 그런 수술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상태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그러한 망각의 시간은 3년 전까지 지속되었다.
지난한 임용 준비의 시간이 끝나고, 발령받은 첫 학교에서의 첫해가 8부 능선쯤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때 수술을 받았던 그 치아의 잇몸 부분에서 평소와는 다른 통증이 느껴졌고, 겁쟁이인 나는 서울에 있는 근처 치과를 바로 방문했더랬다. 그곳에서는 염증이 발생한 것 같다며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으나, (나는 그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는 굳이 굳이 오래 전부터 나의 이를 봐 주셨던 오래된 나의 치과 의사 선생님을 한 번 더 찾아갔다. 불안감이 너무 컸던 나머지,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평일에 병가까지 써 가며 고향에 내려간 것이다.
나의 치과 의사 선생님께서는 염증이 발생한 것이 맞으나 심하지 않으니 항생제로 염증을 가라앉혔다가, 시간적 여유가 많은 겨울방학 기간에 재수술을 하자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첫 학교에서의 첫 번째 종업식을 무사히 마친 이후에 재수술을 받을 수 있었으나, 한 번 더 염증이 재발하게 되면 그때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당시에 이미 들었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은, 그 치아를 살려 두고서 쓸 수 있는 치료 방안이 마땅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래도, 첫 수술 이후 15년 정도 버텨 주었던 내 치아가, 그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또 버텨 주리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첫 학교에서의 세 번째 종업식을 몇 주 앞둔 2024년의 12월 무렵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고, 미리 계획해 둔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이후 방문한 고향의 치과에서 역시나 염증 재발이라는 소견을 듣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수술을 받아볼 수도 있으나 재발 기간이 짧아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유지 기간이 보장되지 않는 그 방법을 권하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결론적으로 발치 후 임플란트를 하자는 말씀이셨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 따위는 뒤로 하고, 진료실에서 훌쩍였다.
임플란트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과 함께 2025년의 2월이 시작되었지만, 바로 치료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며칠 뒤 전보 발표가 날 예정이었고, 그 결과에 따라 내가 소속된 학교의 신학년 집중 준비 기간이 상이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3년만에 학교를 옮기고자 지난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였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이동하고 싶다, 그것이 실패하면 비정기 청간 전보(소속 교육지원청을 옮기는 것)로 내 거주지 근처의 중학교로 이동하고 싶다는 두 가지 카드 모두를 사용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등학교로의 이동은 실패하였지만, 새로 이사 간 집에서 꽤 가까운 편인 다른 중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새 학교에서의 첫 학기를, 나는 내내 마스크를 쓰고 보내야 할 것만 같다. 혹시 몰라 교차 점검(?)차 소견을 들으러 방문한 서울의 다른 치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한 학기만이라도 치료의 시작을 미루고도 싶었으나, 더 오래 치료를 지체했다가는 자칫 멀쩡한 다른 이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플란트 치료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치아를 최대한 살려 보고자 오래도록 애써 주신 나의 치과 의사 선생님이 계신 곳, 그리고 회복 및 요양을 도와줄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앓았던 나의 앞니 하나를, 영구치로 만난 이래 내 일생을 함께했던 나의 일부를 떠나보냈다.
지금 나의 입안에는 앞니 하나만큼의 공간이 어색하게, 그리고 헛헛하게 비워져 있다. 임플란트의 지지대 역할을 해 주는 뿌리 부분이 잇몸 내에서 잘 자리 잡힐 때까지는 최소 석 달의 시간이 필요하고, 나는 빨라야 1학기 말 혹은 여름방학에서야 새로운 치아로 빈 공간을 메울 수 있을 듯하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는 임시 치아(가치)를 치과에서 받아 오기는 하였지만 실제 치아처럼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불편하기도 하고 번거로워 집에서는 그냥 앞니 빠진 사람으로 지내고 있다.
계속 집에서만 살 수 있다면 몇 달의 기간쯤 그러려니 하며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새 학기가 되어 학생들 앞에 설 생각을 하니 무척이나 암담했다. 아이들에게 내 상황을 밝히고 그냥 편하게 학교를 다녀볼까도 생각했지만 가족들조차 나의 영구(?) 같은 모습이 인상적으로 보이는지 웃음을 참지 못하는데다, 중학교 학생들이 내 앞뒤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장담할 수 없어서 그 방법은 즉각 포기했다. 그러다 차라리 마스크를 쓰고 수업하면 어떻겠냐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게 그나마 가장 효과적이고 적절한 대안이겠다 싶었다. 요즘에는 마스크를 쓰는 선생님들이 많이 줄었지만, 코로나 시기 이후로 마스크를 쓴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스스로를 탓하지는 않으려 한다(실제로 치과 의사 선생님들께서 내가 관리를 잘못한 탓이라 볼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첫 학교에서의 스트레스가 내 치아까지 잃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며, 원망할 대상을 자꾸 찾고자 하지도 않으려 한다. 삼십 대에 임플란트를 하게 된 것이 어쩐지 민망스럽고, 하필이면 크기도 크고 잘 보이는 앞니를 잃게 된 것이 속상하지만 그 감정에 너무 매몰되지는 않으려 애쓰고 있다. 올해 3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나의 소속 학교는 달라지고, 오랫동안 '앓던 이' 또한 떠나보냈다. '어쩌면 진정 새로운 나날이 2025학년도부터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요즘 나는 내 입안의 공백을 견디며 하루하루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다만 보고 싶었던, 보려고 했던 지인들을 이 모습으로 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어쩌면 새 학교에서의 첫 학기는,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칩거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3월이 시작되면 내 스스로 판단이 서게 될 것이다. 그 3월이 내 염려와 불안과 걱정보다는 조금 더 무탈하고 순탄하기를 바랄 뿐.
나는 이제는 내 곁을 떠나간 나의 앞니가, 내 인생의 큰 시험들이 다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버텨 주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잔걱정이 많아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던 나의 치아로 자라나, 내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함께해 주었던 나의 '앓던 이'에게, 그간의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애틋함과 서글픔을 전하고 싶다. 또한 너의 빈 자리를 어떻게든 잘 채울 것이며, 그래서 꼭 잘 살아 나갈 것이란 다짐까지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