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빛 커피를 기다리며

by 솔라담



아버지께서는 커피를 참 좋아하신다. 나의 가장 먼 기억 속부터 이어진 오래된 취미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의 커피 한잔을 위해 동트기 전부터 준비를 하시는 게 참 대단하기도 하다. 아버지께선 며칠에 한 번씩, 새벽부터 재료를 준비해서 한 방울, 한 방울을 금으로 된 주전자에 받는다. 한 방울이 떨어지는데도 몇 분씩 걸리는지라 창밖이 검붉게 타오르는 때를 맞추려면 실로 기나긴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 재료는 또 보통인가. 최상의 버진급이라 하시는데, 이미 근방의 재료는 이미 아버지께서 싹 쓸어가신 탓에 이제는 멀리서 구해와야 한다고 불평이시다.


언젠가 아버지께 한번 여쭤본 적 있다. 고작 커피 한 잔을 위해 하루의 모든 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아버지는 한참을 창밖을 보며 고민하셨지만, 대답은 실로 간단했다.


"그냥"


숨 가쁘게 일을 하고, 겨우 끼니를 때우고, 혹시 모를 병마를 대비해 저축을 하고, 겨우 겨우 세금을 내던 그 시기에는 모르셨다고 한다. 그런 바쁜 일상에서의 해방이 어떤 일인지. 얼마나 지루하고 얼마나 재미가 없는지 말이다. 나야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자식으로만 살아왔으니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말이지만, 생각해 보면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 것 같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작은 일에 목숨을 걸고, 별거 아닌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 우리를 보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그 사람들의 삶은 참 한심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 부럽긴 하더라.


그에 비해 나는 하루 종일 자다가 일어나서 시종이 내온 차로 목을 축이고, 저택을 거닐다가 배가 고프면 시종을 불러 식사를 준비시킨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펼쳐보기도 하지만, 이미 서고의 책은 외우다시피 읽은 상태라 더 읽기도 질려버렸다. 참 세상은 재미가 없는 게 맞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억지로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어느새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아버지와의 커피타임을 위해 거실로 향한다. 거대한 저택 서쪽 벽면을 통째로 뒤덮은 검은 유리. 그 너머로 아득한 지평선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위를 세상의 종말처럼 검붉은 노을이 불태우고 있다. 저 노을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저 검은 유리를 만든 사람은 영원히 축복받기를.


거실 중앙, 상아로 된 탁자를 한 손으로 괴고 서 계신 아버지. 귀족 영애의 살결처럼 투명한 백자 커피잔을 들고 내게 손짓하신다. 오늘도 딱 두 잔. 우리가 마실 소중한 커피가 완성되었다고. 황금빛 주전자를 들고 품위 있는 자세로 커피를 따라주신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잔 속에는 창밖의 것 같은 검붉은 노을이 찰랑인다. 볼수록 미혹되는 아름다움. 어찌 칠흑 같은 커피에 이렇게 검붉은 노을빛이 감돌 수 있는 걸까. 와인과도 같이 깊은 풍미와 커피의 쌉쌀함이 혀를 감싼다. 아, 이 맛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수백 년간 이 취미를 이어오셨구나.



고개를 들어 천장에 매달린 헐벗은 여인의 창백한 피부를 살핀다. 풍만한 젖가슴 끝에 피가 서서히 맺혔다가 금주전자로 '뚝' 떨어진다. 그 낮은 소리에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여자는 초점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가련하게 달싹이는 입술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피부의 상태를 보니, 새벽에는 새로운 재료를 구하러 나서야 할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세 시간쯤 떨어진 마을에 이제 갓 성인이 된 처녀가 있다고 하신다. 왜 그토록 처녀만 고집하시는지 아직도 이해할 순 없지만, 뭐 어떤가. 이 길고 지루한 세월 속에서 이 정도 취미라도 있어야지.


부디, 이번에 들르게 될 민가에는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이 있기를. 나는 작은 바람을 품으며, 커피잔 속 검붉은 노을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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