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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aris May 15. 2016

당신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곡성]이라는 이야기의 배신

(굳이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히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 위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우쭐대고 걸으며
투덜거리지만, 곧바로 잊히는 가련한 배우.
그것은 바보 천치가 지껄이는 이야기다.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5막 5장 중에서


[곡성]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이것은 애초부터 과연 우리가 으레 말하는 그런 '이야기'인가? 이 난삽한 영화에는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기괴한 장면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를테면 외지인의 무서운 모습을 목격한 건강원 주인이 천벌이라도 받듯 갑자기 벼락을 맞아 화상을 입고 빈사 상태가 되는 장면이 그렇다. 병원에 누운 그를 찾아 온 그의 아내는 울부짖으며 '어떻게 맞으려고 애를 써도 맞기 힘든 것을 우연히 맞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이 짧고 수상한 에피소드는 기실 [곡성]의 요약본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광경을 우연히 목도하였거나 상상하고 만 어떤 사람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현실적 재난을 당한다. 이 두 가지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까? 그가 벼락을 맞은 이유가 설명될 수 있을까? 픽션으로서의 서사는 대체로 이 연결고리를, 그 인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해냄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곡성]은 벼락을 벼락으로 남겨두고 아무것도 더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련한 등장인물들은 물론 그 인과의 가능성에 현혹당한 관객들을 내팽개친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들은 좀 더 말이 되는 그 세계의 작동 방식을 밝히려고 분투하고 있다. 그들은 영화라는 틀에 기대어 자신만의 믿음을 축조하고 그에 대한 의심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그 세계의 논리를 '발명'해낸다. 의미심장한 대사와 장면들이 교차하고 떡밥들이 던져진다. 프레임화된 모든 광경들은 복선이거나 맥거핀이다. 누군가에게 모든 사건의 원흉은 독버섯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 사건은 외지인의 얼굴을 한 귀신 때문이고, 또 누군가는 그 사건이 한 여자의 얼굴을 한 귀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떤 종교인에게 그것은 악마의 소행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의 증거를 조금씩 본다.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은 이야기가 비는 순간이다. '독버섯'을 포함한 인간계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거나 설명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결과를 두고 사람들은 무속신이나 기독교의 신을 찾는다. 트로이 전쟁에서 용감하고 고결한 헥토르 왕자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제우스의 저버림이라는 이유를 생각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리아스]는 현실의 불가해한 비극에 신화의 논리적 인과를 덧대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종구가 만들기로 결정한 간결한 신화는 외지인이라는 귀신이 딸을 저주했다는 것, 외지인을 죽이면 그 저주가 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약한 그는 믿음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아 결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관철하지 못한다. 결국 종구는 딸과 가족의 생사를 걸고 두 신들(특정 종교의 신이라기보다는 아마도 가장 원형적인 형태의, 영원히 대립하는 조로아스터교적인 선신과 악신과도 같은 존재들로 보이지만 그 속성은 마지막까지 미지로 남는다) 사이에서 죽도록 뛰어다니고 또 농락당한다.


믿음과 의심의 배신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다른 갈래의 이야기는 양 부제의 것이다. 양 부제가 교회에서 소리 없는 질문을 거듭한 끝에 외지인을 처단하러 가장 깊고 어두운 곳으로 갔을 때, 그는 죽지 않은 외지인을 발견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은 악마인가? 정체를 말하라." 외지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양 부제는 자신의 정체가 악마라고 믿을 것이므로 그 질문에는 의미가 없다고 대답한다. 양 부제는 그의 말을 부정하며 그의 정체를 듣겠다고, 그가 악마가 아니라면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이미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사라진 뒤다. 양 부제의 믿음은 그의 말을 배신한다. 그는 성서를 읊으며 자신을 비웃는 악마를 본다. 부활한 신의 육신을 보듯이 분명하게 만질 수 있는 피와 살과 뿔이 있는 형상을 본다. 외지인은 정말 악마였을까? 이 질문은 외지인의 말처럼 별 의미가 없다. 양 부제는 그를 악마로 보기로 했기 때문에 그를 악마로 본 것이다. 출구가 없는 것은 양 부제 스스로의 믿음이다.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종구는 표면상으로는 선택지를 부여받긴 하지만 덕택에 더 고약한 지경에 처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진실에 다가가려는 과정에서 부성이라는 방패를 들고 다양한 죄를 저지르므로, 이것만은 어쩌면 당연한 인과응보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종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한 신은 자신을 믿고 기다리라고 하고, 다른 신(혹은 신의 사자)은 자신을 믿고 지금 당장 가라고 한다. 닭이 세 번 우는 동안 그는 베드로처럼 한쪽 신을 부정하는 결정을 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지는 아주 흔한 괴담의 서사와 일치한다. 이를테면, 한밤중에 이층집의 윗층에서 어머니가 불러서 올라가려고 했더니 아랫층에서 어머니가 나와 윗층의 여자는 가짜이며 귀신이라고 하는 이야기, 혹은 아들이 잠든 침대를 지켜보다가 문득 침대 아래를 보았더니 거기에 숨어있는 또 다른 아들이 침대 위의 아들은 가짜라고 하는 류의 이야기이다. 이때 믿음과 의심의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본 것인가, 들은 것인가? 오감의 인식에 근거한 이 모든 것은 확실하며, 동시에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이런 이야기에는 정해진 결말이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거기에는 해피엔딩의 예감이 없다. 그 이야기는 그냥 거기에 등장하는 누군가를 엿먹이기 위해 만들어진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이것은 종구의 선택에 따라 그의 운명에 특별히 다른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양 부제도 마찬가지다. 그는 거기서 악마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믿어서 만났거나,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믿었거나, 이 인과관계의 선후는 거대한 맥락에서는 의미가 없다. 마치 무명이 딸이 아픈 이유를 묻는 종구에게 '네가 죄를 지어서'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딸이 아파서 죄를 지은 것인가, 죄를 지어서 딸이 아픈 것인가? 종구를 따라오며 그의 이야기를 지켜본 이들에게는 당연히 전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무명은 태연히 그 인과를 뒤집는다. 많은 고전 비극이 그러하듯이 운명의 인과율은 맞추게 되어 있는 것을 맞출 뿐이고, 그를 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무용해진다.


한 아이의 운명을 두고 두 신이 다투었든, 아니면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든 간에,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까마득한 인식의 허방에서 낙하하지 않고 살아남는 방식은 그럴싸한 이야기를 직조하여 다리를 놓고 그 어둠 위를 건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큰 고통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한 한 방편으로 아귀가 완벽히는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를, 이야기의 형태를 한 믿음을 만들어내고 그것과 함께 살아남기를 택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잘 짜여진 이야기로서 기능해야 할 픽션의 임무와 윤리를 가볍게 그 허공으로 내던지고 어디로도 관객이 무사히 건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영화의 형태를 한 이야기에 대한 관객의 믿음과 매혹은 마치 무정한 야훼에 대한 인간의 그것처럼 번복해서 시험당하며, 종국에는 배신당한다. 가장 강한 믿음을 배신하는 그 믿음의 이면에서 이야기의 빈 곳을 메꾸는 소리는 기의 없는 울부짖음인 곡哭이다. 그리고 어둠이 내린 이야기 바깥의 구경꾼들은 망연히 멈춰 서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욕망을 가진 인간들을 연민하며, 곡이 울리는 그 어두운 틈새를 바라볼 뿐이다.



*두 번 정도는 보아야 어떤 영화에 대해 길게 입을 대는 것이 부끄럽지 않지만, 딱히 더 볼 기회가 생길 것 같지 않으므로 일단 흘러나오는 생각을 대충 정리하여 둔다.

**이야기 내에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거대하고 모호한 힘을 배경에 깔고 무력한 인간을 짓밟는 방식의 이야기도 호러의 하위 장르로서의 '코즈믹 호러'라는 명칭아래 어느 정도는 장르화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곡성]은 나쁘지 않은 호러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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