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마사키의 [할복]
우리는 과연 무엇을 건넸던가?
친구여, 내 심장 속 요동치는 피
신중함의 시대조차도 결코 철회할 수 없는
한 순간의 패배에 서린 그 무시무시한 대담함
이것으로, 오직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했었네
우리의 부고 기사에도
자비로운 거미줄이 드리워진 기억 속에도
혹은 우리의 빈 방에서 야윈 변호사가 떼는 유언장의 봉인 아래에도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 T. S. 엘리엇, [황무지]
고바야시 마사키의 영화 [할복]의 서사는 이중의 액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이이 가문에서 남긴 한 사무라이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첫 번째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그 안에 등장하는 쓰구모 한시로와 사이토 가케유의 입을 통해 두 번째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한 몰락한 사무라이가 어느 저택의 대문 앞에 와서는 그 문 앞에서 자신이 할복하는 것을 승낙해달라고 청한다. 기본적으로 그것이 전부인 이야기이지만, 그 사무라이─쓰구모 한시로에게 사이토 가케유가 얼마 전에 똑같이 집을 찾아와 할복의 승낙을 청한 지지이와 모토메라는 사무라이 이야기를 해 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쓰구모는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를 사이토에게 해 준다.
쓰구모와 사이토, 두 사람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두 가지 이야기의 간극에서 기묘한 효과가 발생한다. 관객은 한 가지 버전의 사실을 먼저 보고, 그 안에 등장하는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목도한다. 그 뒤에 갑자기 그렇게 죽은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보게 되는데, 이 올곧고 선량하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 사무라이는 관객이 앞의 이야기를 보고 예단할 수 있었던 삶을 살았을 이와는 놀라울 정도로 다르지만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같은 사람이다. 이는 서로 상충하는 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진정한 '지지이와 모토메'의 이야기는 후자뿐인데, 그것만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쓰구모의 이 이야기에는 뚜렷한 목적이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극중에서 쓰구모의 '이야기'는 실패하고, 기록-사실은 다르게 쓰이게 된다. 그가 자신의 배를 가르기 위한 검과 함께 들고 온 이야기,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피로 써내려간 진실은 공고한 의례와 형식으로 이루어진 기만적인 세계관을 돌파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가 목표한 연민과 사과를 얻지 못하며, 그 나름의 복수와 최후도 사라진다. 후대에 남겨진 기록에서 쓰구모의 이야기, 지지이와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하는 형태로 지워진다. 그러나 결국 영화라는 이야기의 형태로써 이들의 삶은 다시 말해지게 되므로, 쓰구모는 사이토가 아닌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러 온 셈이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영영 모르는 채로, 성실히 임무를 마친다. 사이토가 들려주는 한 사무라이의 죽음이 죽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오히려 그의 삶에 대한 잘못된 초상을 그려내는 것과는 반대로, 영화 속 쓰구모의 죽음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들을 일거에 완결시키며 누구의 입을 통해서도 말해지지 않는 진실을 그려낸다.
[할복]은 이야기의 틀 속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이야기, 묻힐 운명에 처한 이야기가 한 자루의 검처럼 겹겹의 형식을 뚫고 관객에게 육박해 옴으로써 그 화자가 한 번은 실패한 목표를 기어코 달성하는 이야기이다. 모르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낄 줄 알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픽션의 가장 위대한 윤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타인의 개별적 삶에 대한 상상력을 고취시킴으로써 액자 바깥에 자리한 최종심급의 심판관-관찰자에게 차가운 글자로 남은 한 인간의 이름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재차 더듬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종이 위에 기록된 쓰구모 한시로의 이름이 나오지만, 그 이름의 의미는 이제 같지 않다.
서사의 다층적 구조, 정통적으로 훌륭한 연기와 음악, 장면 사이사이에 의도적으로 삽입된 간극들을 비롯한 이 영화의 거의 완전한 형식미는 그러한 미덕에 더 기여한다. 관객은 일정 정도 이야기로부터 거리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이야기의 진실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와의 간격과 진실 찾기로서의 속성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영화들에서 관객은 증언자보다 한 단 위에 있는 재판관의 자리에서 증언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확히 반대다. [라쇼몽]의 마지막에 관객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할복]의 마지막에 관객은 일어난 일들을 모두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두 이야기들은 똑같이 눈 앞의 증언자-이야기꾼 앞에 서서 오만한 태도로 판단을 준비하던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고, 눈 앞의 인간을 연민할 수 있도록 만든다. 누스바움이 휘트먼의 시를 인용하며 말한 것처럼 이 이야기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타인의 절망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그 개별자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여 형평을 맞추는 문학적 재판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소 뜬금없지만 [할복]이 더 감명깊게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를 본 날 아침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신안해저선 전시를 보고 왔기 때문이었다. 수백년 전에 침몰한 무역선에 실린 엄청난 양의 그릇들을 쇼핑하듯이 지나치고 나면 출구로 나오는 길 쪽에 선원들이 쓰던 바둑알과 장기판, 취사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는 싯귀가 쓰인 백자 그릇이 한 장 보이고, 그 옆에 맺음말이 나온다. "모든 유산에는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서려 있습니다. 마땅히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안해저선에 탔던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빌면서 이 특별전을 마칩니다." 그걸 보는 순간 관람객은 새삼스럽게도, 이 모든 아름다움과 세월에 빛바랜 슬픔을 다시 생각한다. 오래되고 귀한 도자기들이 그 물건을 옮기고 있었던 이들의 삶을 바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유물들은 그 삶의 일부였고, 이제는 그 삶의 확실하고도 유일한 증거이므로, 이제 그들은 이 물질들로부터 차마 상상되지 않거나 잊힐 수 없다.
아주 간단한 역사적 사실로부터, 우리에게 남겨진 몇 개의 물질들로부터, 우리는 마땅히 더 많은 것을 상상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할복]의 뛰어난 점은 너무나도 많지만, 내게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은 이 다층적인 이야기가 그 뛰어난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 총체로서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방식, 그리고 그럼으로써 성취하는 인간적인 상상력과 연민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