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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aris Dec 17. 2015

그 빌어먹을 [자본론]이라는 책

[자본론의 읽다]의 양자오와 [지미스 홀]의 지미의 코뮤니즘

양자오 선생의 [자본론을 읽다]을 읽은 다음 날,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을 보고, 그 다음 날에는 켄 로치의 영화 [지미스 홀]을 보았다. 출간된 지 1세기도 더 지난 책과 50년이 지난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자 학살과 80년도 더 전에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한 공산주의자의 좌절. 이 과거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 21세기에 접어든 지도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각기 다른 매체로 호출되어 이 시점에 줄을 지어 내 눈에 띄게 된 것일까. 내가 의식적으로 이런 것들만 찾아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들은 현재가 아직 단단히 완성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저마다의 어떤 징후일 것이다.


[지미스 홀]의 지미는 마을 회관을 재건하고 그 안에서 전인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소박하고도 원대한 야심을 지니고 있다. 이런 지미를 '빨갱이'로 몰아 공격하는 세력의 선봉에 선 셰리던 신부는 분통이 터진 것처럼 외친다. '그 빌어먹을 [자본론]이라는 책(The bloody book, Das Kapital )!' 어떤 시점 이래로,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그 빌어먹을 이상에 대한 책에 조금씩 빚을 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론을 읽다]는 타이완의 지식인 양자오의 서양 고전 강의 시리즈 3부작 중 마지막 권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과 프로이트의[꿈의 해석]을 잇는, 20세기를 바꾼 마지막 명저는 당연하게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인데,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때까지 달려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장 강렬한 목소리가 담긴 최종권이다. 앞의 두 권이 [종의 기원]과 [꿈의 해석]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별로 관심이 없었던 독자에게는 해당 도서를 '읽고 싶어질 마음이 들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데에 충실하게 해당 저서의 핵심 내용을 가운데에 위치시키고 적당한 간격으로 원의 윤곽을 그려 독자들을 그 사이에 포섭하는 데에 집중한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도입부부터 준비 운동 따위는 집어치우고 [자본론]이라는 책의 핵심에 육박한 뒤 편견과 분리하여 정의한 핵심 개념들에 대해 쉴 새 없이 설파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정의하는 저자 자신으로부터 [자본론]이라는 텍스트를 떼어낼 수 없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자본론을 읽다]는 학생 시절 반공주의 국가였던 타이완에서 몰래 숨어 [자본론]을 만난 이야기를 담은 서문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시작된 저자의 학문적 여정의 서사 속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자본론]이 위치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객관적인 문체로 쓰여지지 않았으며 그 애정과 편애를 애써 숨기지 않는 지점에 있다. '이 마르크스라는 거인을 독자 여러분께서 잊지 않기를 삼가 바란다'는 당부의 말로 끝맺어지는 이 책은 누가 봐도 지나치게 마르크스주의적이며, 어떤 이상의 실패에 대한 애조와 더불어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끈질긴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양자오가 주목하는 것은 마르크스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했던 혁명가이자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가 아니라 '젊은 철학자로서의 마르크스'라는 비교적 단단한 페르소나다. 이로부터 실패한 혁명의 책임과 그 여파가 분리되고, 피케티를 비롯하여 그 이전의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는 마르크스의 정교성이 떨어지는 경제학적 논의도 잠시 뒤로 제쳐진다. 마르크스의 시대와 이후 시대를 살아간 다른 이들이 왜곡하고 보충해 온 무수한 개념들이 마르크스의 이름이 씌워진 채 그의 유물로 남아 있지만 인문학자인 저자가 집중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놓지 않았던 인간의 본질에 대한 믿음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이론의 시작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먼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정신'이 있다고 할 때, 이 '정신'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현실로 전개되며 이로 인해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것이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순수한 인간의 시각에서 역사의 변화란 추상적이고 논리로만 가정할 수 있을 뿐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정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얻은 진실성의 충동이 전개된 시험이자 투쟁이라고 간주했다(...)그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 즉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실현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고 상상하는 인간이라고 보았다.

-[자본론을 읽다], 65~66쪽


인간 세상에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서의 공산주의 체제 수립은 이미 실패한 실험으로 드러났으며, 러시아에서 동유럽을 거쳐 중국에 이르는 이 커다란 비극 탓에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공산주의 천국의 수립을 꿈꾸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상상한 체제는 현실의 인류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고귀한 정신을 필요로 한다. 정치권력의 운용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점을 나는 아주 분명하게 확인했고 전부 받아들였다(...)공산주의 천국이 실패로 판명되고 오늘날 우리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기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는 더더욱 필요하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밖의 기준을 제공하여 우리가 그것으로 인생과 사회를 바라보고, 그 대조를 통해 자본주의라는 가치가 결코 유일하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 준다.

-[자본론을 읽다], 235쪽


[액트 오브 킬링]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살육한 인도네시아의 무장 단체의 수장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살육의 현장을 회고하고, 매스컴 앞에서 '신도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당당히 선언할 때, 나는 문득 신의 찬성은 거기에 필요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무심코 생각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인간의 이상이니까. 1세기 동안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은 지나치게 광범위한 포섭력을 지니고 세계의 구석구석을 쏘다녔으며 그 낙인이 찍힌 어떤 영역은 이미 마르크스의 이상과도 한참 멀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누군가로 하여금 그 이름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신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특정한 세계의 당위, 즉 졸렌Sollen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믿음에 가까울 것이다.


[지미스 홀]의 지미는 성공하지 못한다. 지미의 실패는 다른 크나큰 비극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그 빌어먹을 책'의 또 다른 안타까운 실패다.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춤을 추기 위해' 만들었던 마을 회관은 파괴당하고, 그는 조국으로부터 영영 추방당한다. 젊은이들이 춤을 출 자유는 '공산주의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압살당한다. 지미는 '우리는 탐욕이 아닌 필요에 의해 살아야 한다. 춤을 추고, 축배를 들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연설한다. 춤을 추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이 진실이라면, 그 춤은 한 사람의 인생만큼이나, 한 세계의 수명만큼이나 길 것이고, 그 몸짓들은 온전히 춤을 추는 이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삶의 무대가 되기까지 세계는 아직도 이렇게나 멀었다. 우리는 하나의 유령으로 남은 청사진을 완성시켜야 한다. 그 이름은 무엇이라도 좋다. 


세계가 완성될 때까지 부디 누군가가 이 참담하고 영광된 실패의 내력들을 기억하기를.


"우리는 계속 춤출게요. 계속 꿈꿀게요."

-[지미스 홀] 중에서



201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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