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
우리가 혹은 적어도 내가 기억이라 언급하는 것(즉 순간, 장면, 고착된 탓에 망각할 수 없는 사실)은 실은 마음속에서 반복해 들리는 어떤 이야기이며, 말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종종 바뀐다. 처음에는 서로 상반된 감정들이 너무 많이 얽혀 있어 우리는 삶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꾼이 나서서 상황을 재배치하는 것일 터이다. 어쨌든 과거에 관한 한 우리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윌리엄 맥스웰, [안녕, 내일 또 만나], 35쪽
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는 한 살인 사건에 대한 짤막한 삽화를 지나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소년의 회고로 시작된다. 두 이야기 간의 관계는 모호하며, 소설보다는 작가 자신의 회고록에 가까운 후자의 이야기에서 작가는 어머니라는 대체불가능한 존재를 상실한 어린 소년의 감정 상태와 혼란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복구되지 못하는 어머니의 빈 자리 외에는 모든 것이 영구히 그대로이길 바라는 아이 특유의 간절한 마음,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적절히 돌보아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작은 유감,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관계를 비롯하여 주변에서 감지되는 각종 성적인 뉘앙스에 대한 당혹감과 첫 자위의 순간까지, 이 모든 유년의 풍경들은 비통할 정도로 아름답고 또 솔직하여, 독자가 겪어 보지 않은 시대와 상실에 대한 향수(鄕愁)를 자아낸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아버지의 새로운 집 건설 현장에서 클래터스라는 친구를 만나는 시점부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두 아이는 건설 현장에서 매일 만나 작은 모험들을 즐기는 친구가 되고,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안녕, 내일 또 만나'라는 인사를 남기고 헤어진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처음 등장했던 살인 사건으로 다시 돌아간다. 과거에 가족을 잃은 아이와 미래에 가족을 잃을 아이는 그 모든 사건이 벌어진 이후 단 한 번 우연히 다시 만나지만, 주인공은 그를 지나쳐가고 그 일을 계속 후회하게 된다.
마법이 시작되는 것은 그 이후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일어난 마법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문학을 사랑하고 다룰 줄 아는 사람만이 누군가에게, 그리고 이 세계에 걸 수 있는 것으로, 아름답다면 아름답고 허무하다면 허무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오랫동안 세상에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마법이다. 작가는 클래터스의 삶을 바꾸었을 그 살인 사건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외면했던 수십 년 전의 사건을 다시 소설의 형태로 만들어내기 위해 그 시절의 신문을 뒤지고 자신이 어릴 적 경험했던 풍경들을 되짚는다. 1920년대 링컨에 살던 소작농들의 삶의 형태, 그들의 우정과 사랑, 꿈과 좌절된 욕망, 짧은 행복과 갖은 불행, 한 소작농의 아이와 그 아이를 사랑하던 소 치는 개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서.
상상에만 존재하는 증인의 입증되지 않은 발언은 법정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몇 번이나 증명되었든 실존하는 증인이 맹세하고 한 증언이라 해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부터 나오는 내용은 진실과 허구의 혼합이며, 읽으면서 어느 곳이든 미심쩍은 부분을 독자인 당신이 무시한대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음을 밝혀둔다. 만약 내 글에 조금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그 점에 만족하려고 한다.
-100쪽
오랜 기간 동안 [뉴요커]의 편집자로 있었던 윌리엄 맥스웰은 그렇게 소설을 활발하게 쓰는 작가는 아니었다. 그가 이 회고록-소설을 쓴 것은 72세가 되어서였다. 그는 소년 시절 문학적이고 섬세한 아이 특유의 외로움을 잠시 달래 주었던 한 친구를, 그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뒤 결국 실현시키지 못한 인사를, 그 친구를 지나쳤던 고등학교 복도의 풍경을 오랜 시간 동안 곱씹었던 것이 분명하다. 작가는 마음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앨범까지도 뒤져 보지만, 클래터스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더욱 큰 후회에 빠져 버린다.
작중 언급되는 자코메티의 조형물 [새벽 4시의 궁전]은 클래터스를 처음 만난 주인공 아버지의 집 건설 현장이기도 하고, 맥스웰이 이 소설로 재구성된 세계이기도 하다. 자코메티는 이 열린 집 형태의 조형물을 어떤 여인과 함께 한 시간들 속에서 상상해냈는데, 맥스웰도 이 책에서 자코메티와 비슷한 일을 한다. 골조로 이루어진 미완성의 집에서 모험을 즐겼던 클래터스와의 시간과 잃어버린 가능성들을 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는 작은 책 한 권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 궁전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여인은 곁을 떠났지만 그 마음만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오랫동안 남긴 자코메티의 작품처럼, 맥스웰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클래터스를 생각하며 종이와 활자라는 재료를 써서 그랬으리라고 믿어지는 세계를 만들어낸 뒤 그 골조 속에 자신의 바람을 불어넣어 우리에게 보여 준다.
맥스웰은 그가 유년기에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세계와 그 사이에서 불행을 겪은 한 아이의 삶을 문학의 힘으로 복구해낸다. 애정과 연민을 담아 어쩌다 범죄에 연루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면서, 그 사이에 놓인 한 어린 인생이 다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염원하는 이 이야기는 보다 많은 상상력과 선의로 가득찬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이자, 더 다정하고 덜 지독한 매큐언의 [속죄]이다. 이 문학 작품은 그 어느 종류의 책도 아닌 동시에 양쪽의 미덕을 모두 성취한다. 여기에 담긴 선량함과 진실성을, 그 지극히 윤리적이고 문학적인 태도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농장의 늙은 개가 내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평온한 일상을, 이 책은 늙은 개와 비견할 만한 노인 특유의 끈질기고 성실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맥스웰은 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가 유년기에 남긴 인사라는 형태의 약속을 지키러 온 것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한 소년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린 다른 소년에게. 그땐 미안했어. 그래서 널 다시 만나러 왔어. 네가 안녕하기를 바라. 이 이야기가 메꾸는 것은 작가의 기억과 죄책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잊혀진 불행들의 시대에 이런 다정하고 사려깊은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