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못 그려도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요즘엔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서 그런지 자주 듣지는 않지만 옛날에는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디자인과를 졸업하셨다고요? 그럼 그림 잘 그리시겠네요”
“디자이너면 그림 잘 그리시나요? 제 얼굴 좀 그려주세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디자인 영역보다는 순수 예술인 회화 쪽에 더 가깝다. 회화와 디자인은 각 분야를 전공한 사람만이 구별할 수 있고 보통 사람들은 전공 분야와 상관없이 미술 대학을 졸업하면 그림을 잘 그린다는 편견을 갖게 된다.
미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입시 미술을 배우고,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는 그림을 그릴 일이 거의 없었다. 직접 손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여러 가지 툴을 이용해 디자인을 충분히 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만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는 다른 디자이너에 비해 무기를 하나 더 갖고 있는 것과 같기에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하곤 했었다.
나만의 무기를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러스트 드로잉 수업은 생각보다 고된 길이었고 학기가 끝날쯤엔 그림을 잘 그리는 영역은 나와 별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디자이너, 이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브랜드 관련 그래픽을 제작하면서 느끼는 것은 ‘디자인을 잘한다’는 말에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디자인 소스를 잘 만들어내는 능력일 수도 있고, 유행하는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하여 비슷한 느낌을 구현해 내는 능력일 수도 있고,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잘 조합해 새로운 느낌을 연출하는 것도 디자인을 잘하는 능력이 될 수 있다. (‘디자인 소스’는 그래픽화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으로 사진, 한글 영문 등의 폰트, 아이콘, 일러스트 등이 된다.)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요리사에 디자이너를 비유해서 말해보면 좋은 식재료를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디서 어떻게 식재료를 구하고 어떤 요리법으로 요리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요리처럼 그리고 이걸 요리사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디자인에도 비슷한 과정이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식재료를 생산지에 가서 찾아내는 것은 디자인에 필요한 디자인 소스를 직접 만들 수 있는 것, 그림을 잘 그리는 것에 해당한다. 신선하고 좋은 품질의 식재료를 마트에서 찾아내는 것은 자신이 직접 제작한 디자인 소스(그림)는 아니지만 트렌드를 반영할 수 있는 디자인 소스를 찾아낼 수 있는 것,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식재료로 최상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디자인 소스로 편집을 잘하여 목적에 맞는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회사 시스템에 따라 디자이너는 ‘셔터 스톡’을 통해 완성된 디자인 소스를 다운로드하고 이걸로 디자인을 하는 것과, 처음부터 디자인 소스를 직접 제작하여 결과물까지 만들어내는 것 두 가지로 디자인 일을 하게 된다.
첫 회사에서는 디자인 소스를 직접 제작하여 결과물까지 만드는 환경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래픽을 작업하기 전 그래픽 소스부터 제작해야 하니 작업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게다가 손이 빠른 편도 아니라 업무를 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느꼈다. ‘아 우리 회사도 그냥 셔터 스톡 정기 결제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다음 이직한 회사는 셔터 스톡 정기 결제를 하는 곳이었는데 수백수천 개 디자인 소스 중에서 목적과 콘셉트에 맞는 소스를 찾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이걸 잘 조합해내는 것도 새롭게 느낀 어려움이었다. 여러 개를 다운로드하여 재 조합하는 과정에서 머릿속에는 늘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그래픽 소스를 사용하면서 나는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또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셔터 스톡에서 ‘풍선’을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 제작하는 그래픽의 목적과 콘셉트에 따라 원하는 그래픽 소스를 다운로드하고 이걸 재조합하여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셔터 스톡을 활용하여 디자인 일을 하는 것이다.
셔터 스톡을 사용하지 않는 곳은 사진과 같은 풍선을 직접 만드는 것부터 일을 시작한다.
나만 이런 고민을 갖고 살아가나 생각이 많아질 때 브랜딩 관련 유튜브 콘텐츠에서 해답을 찾았다. 주어진 소스를 편집하여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도 디자인을 잘하는 것의 하나라고.
(해당 영상을 캡처했었는데 영상을 본 지 오래되고 핸드폰을 바꾸면서 사진이 사라져서 아쉽다)
독특한 식재료가 아니어도, 품질이 뛰어난 식재료가 아니어도, 평범한 식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내는 요리사처럼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 소스로 최상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