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 어디서 얻으세요? 디자이너와 영감
디자이너 인터뷰를 보면 꼭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작업할 때 영감은 어디서 얻으세요? 질문을 받은 인터뷰이는 유명한 작가, 새롭게 주목받는 작품 등 본인의 영감 꾸러미를 펼쳐서 보여준다. 인터뷰이의 대답을 듣고 인터뷰어가 잘 알고 있다는 듯 인터뷰를 이끌어간다. ㅇㅇ 작품으로 유명한 ㅇㅇ 작가님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관심 갖고 지켜보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들어는 봤는데 익숙하지 않아 이름만 알고 있는 작가에 대해 서로 공감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인터넷 창을 열어 검색해 본다. 이런 작품을 만든 사람이었구나 작품활등을 쓱 훑고 창을 끈다. 분명 전에도 들어봤는데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 멋진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들은 꾸준히 영감을 얻는 자기만의 꾸러미가 있는 건가? 문득 일이 주어졌을 때 비헨스와 핀터레스트만 주야장천 들여다보는 내 모습과 비교되었다.
요즘은 여기저기에 다양한 인사이트가 넘쳐나서 시각적 이미지를 찾을 수 있는 비헨스, 핀터레스트 외에도 롱블랙, 폴인, 인스타그램 같이 다양한 생각에 도움을 주는 콘텐츠가 많아졌다. 굳이 시간을 내지 않고 핸드폰 몇 번 보는 것으로도 영감을 찾을 수 있는 사실은 꽤나 매력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이거 괜찮은데?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캡처한 사진들은 핸드폰에 쉽게 쌓이고 정작 필요한 순간에 그때 그거 어디에 있지 캡처했던 것을 찾느라 시간을 다 보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주변 지인들은 영감 수집과 함께 분류 작업을 꼼꼼히 한다. 반면 나는 열심히 보는 만큼 분류해서 차곡차곡 쌓아두는 작업을 잘하지 못한다. 두 가지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 내가 봤던걸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매우 희박하고 둘째 간혹 써먹어야 할 경우가 있을 때 생각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프로젝트에 필요한 영감은 일을 받고 비헨스 핀터레스트에서 찾아보는 것이 직접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그 외인사이트는 한 층 위의 고차원적인 영역을 담당한다. 당장 살을 빼겠다고 단기간에 샐러드만 먹는 게 비헨스, 핀터레스트를 보는 것이라면 규칙적으로 꾸준히 운동을 해서 살을 빼는 게 여러 플랫폼과 콘텐츠를 통해 영감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책 <사람, 디자인, 브랜드>에서 실무 디자이너 인터뷰 중 영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보통 영감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서사 장르에서 예술가들의 재능을 표현하는 극적인 도구로 보이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극 중에는 예술가가 고뇌하고 있다가 영감이 떠올라야 문제가 해결되잖아요. 아마 그런 것들을 평소에 많이 보니까 '영감을 받아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영감에 대한 인터뷰를 볼 때마다 불편했던 마음은 대중매체가 주입시킨 편향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오히려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 보다 마감시간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일을 해내기 위해 끙끙 앓다 보면 해결될 때가 많다고 인터뷰이는 답했다.
새로운 오프라인 매장 오픈을 앞두고 VMD 컨셉을 기획하던 중 여러 난관을 맞닥뜨렸다. 지류에 표현되는 그래픽뿐만 아니라 제품이 진열되는 집기부터 사인물까지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기획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생각한 것들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감이 없다 보니 일주일 내내 어떻게 컨셉을 공간에 시각화할지 고민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주말을 맞이했다. 할로윈 시즌을 맞이해서 놀이동산에 놀러 갔는데 평소에 크게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놀이공원 속 여러 공간에서 할로윈 테마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참고할 수 있는 좋은 레퍼런스가 되었다.
또 한 번은 브랜드 SNS 마케팅에 대해 몇 주 동안 고민했을 때가 있었는데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보고 마케팅을 풀어내는 방식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마케팅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두 사례 모두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계속 생각하다 보니 의외의 장소에서 영감을 얻게 된 케이스다. 나에게 영감은 번뜩 떠오르는 것이 아닌 엉덩이의 힘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알아내다, 발견 의미를 갖고 있는 유레카(Eureka)의 기원을 보면 갑자기 떠오른 영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왕관을 녹이지 않고 순금으로 만든 것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명령을 받는다. 한동안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던 중 자신이 들어간 욕조에 넘치는 물을 보고 해결책을 찾았다는 얘기를 읽었을 때 내가 방점을 찍고 싶은 부분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던'이다.
생각보다 영감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영감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고민할 때,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몰입하여 생각할 때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니 뚜렷한 영감을 얻는 곳이 없더라도 불안해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