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재회, 더 본질적인 건 그게 아닐 텐데?
대한민국만큼 연애와 사랑에 집착하는 나라도 드물다.
신곡의 가사는 늘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고, 주말 카페에는 커플이 와글와글. 몇 년 사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온 것도 그 연장선일지도. 나는 원래 이런 프로그램에 큰 관심이 없지만, <환승연애>만큼은 매 시즌 챙겨본다. 헤어지면 재회는 절대 없다고 믿는 사람의 눈으로, 이 프로그램 속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관찰하는 일이 꽤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환승연애 4>에서 원규 ×지현 커플의 여사친 웨딩드레스 논쟁.
나 역시 꽤 감정이 격해졌고, 소정이(유튜브 <점심이네> 메인배우)가 댓글 좀 달아달래서 와랄라 썼지.
설마 나한테 내로남불이라고요? 그럼 이제부터 아주 정교하게 반박을 해보려 한다. (다들 쥬것어, 진짜!)
셀프 스튜디오(통칭 인생 네 컷)는 5천 원 한 장 내면 어디서든 누구든 찍을 수 있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나누는 담소도 어느 누구하고든 할 수 있다. 뮤지컬도, 영화도, 언제나 즐길 수 있는 소비 컨텐츠지. 아이돌 덕질도 누구든 그 재능을 사랑할 수 있는 대중문화잖다.
학교 때부터 절친한 후배 상준 씨(일년에 두세번 회동 때마다 같이 인생 네 컷 찍음)랑 나랑 이 논제에 대해서 예전부터 이야기했었다. 만약 서로의 연인이 이런 걸 싫어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근데 애초부터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게 우리의 결론.
"너도 해! 너도 찍어!"
근데 결혼은 좀 많이 다르지. 아무리 이혼과 재혼이 스스럼 없어진 사회라지만, 결혼은 여전히 한 사람의 인생에서 꽤나 중요한 사회적 서약이고 한 남녀가 맺어졌다는 걸 다들 알아야 하는 의식인데.
근데 그런 상징적인 웨딩드레스를 '남자 보는 눈 필요해서' 남사친한테 보러 와달라고 한 그 여자도, 그걸 또 쿨한 척 이미 결론 내리고 지현이한테 말한 원규가 그 오해와 불편을 낳을 수 있는지 모를 리 없는 걸?
이거다.
이성 친구 사이에 커피나 술 한잔은 가능하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모텔에 함께 들어가거나, 오프 타임에 등을 쓸어 넘기고 손을 잡고 포옹하며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그냥 친구"라고 말하는 순간, 그 관계는 이미 책임의 영역에 들어선다고.
참 상대에 대한 예의도 책임도 없고.
아니, 다들 정서지능들이 왜 이리 떨어져, 화나게 할래?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만의 고유한 기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입장에선 참 내로남불이다 할 수도 있는 거 인정하고 있거든.
두세 달 전 기량이와 남자친구분이랑 셋이 같이 이 논제가 나왔을 때, 기량이는 "음, 인생 네 컷은 안돼!"라고 했고, 남자친구분께서도 이성 간의 소유욕을 "내가 있는데 주인이 다른 강아지를 쓰다듬는 걸 보는 본능"에 비유했다. 그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지.
근데 포인트는 이거야. 인생 네 컷, 카페타임 같은 이 기준이 안된다고 우기는 건, 내 소유의 가치문제가 아니라 내 자존심이 다칠 확률에 따른 계산이 문제라는 점.
관계는 쌍방인데, 어느 누구는 위아래로 뜯어보면서 '아, 이 정도면', 어느 누구는 내 영역을 뺏길까 봐 두려운 거.
결국 그렇다면 어떤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열등감의 크기 아닌가?
아니 뭐... 자기 솔직한 심정이 이러하니, 안 해줬음 싶다고 감정에 대한 얘길 한다면, 어느 정도 맞춰가겠지. "아, 너는 나랑 다르구나. 좋아, 그러면 조심할게." 근데..., 이게 진짜 웨딩드레스 사건이랑 시작부터가 같은 급이냐 이거야. 웨딩드레스는 사회적 서약과 존중의 문제라니까?
그리고 난 상대에 대해서 넌 이랬으니까 이럴 거야,라고 다음 행동패턴이나 의중까지 판단하는 거, 그게 나는 진짜 아니라 보는 거거든.
애초에 <환승연애>의 본질은 사랑보다는 이미 내 손을 떠난 사람에 대한 미련한 소유권 주장이라 보거든.
남이 하면 '미친 집착'인데 내가 하면 '절절한 서사'가 되는 그 이중성. 그게 그냥 바깥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재미는 있어. 근데 나는 백번 생각해도 재회 같은 걸 어떻게 해,라는 생각을 하거든. (얘기 듣고 상담해 줄 때마다 그렇지.)
재회란 결국 과거의 환영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서로를 다시 선택하는 일이어야 한다. 잘못을 분명히 인지하고, 사과하고, 반복하지 않겠다는 신뢰가 없다면 다시 시작해도 같은 이유로 끝나더라. 그리고 완전히 종결날 때는 딱 두 케이스.
양쪽 중 더 많이 참고 용서해 주곤 하던 사람이 이 루프를 도저히 용납 못하고 깨는 경우.
아니면 정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 한쪽이 결국 넘어버리는 경우.
나라면 솔직히, 지현이 웨딩드레스 사건 이후 원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했을 것 같다. (물론... 음, 인간이고 사람 다 다르니까! 그래!)
다만 그 감정을 넘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그때 내가 너를 존중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이 한마디. 박박 우기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상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왜 이 간단한 말을 다들 그렇게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내가 너무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나?
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너도 해도 된다.
그렇지만 정서지능은 챙기자고.
여담
(1)
가끔 자기 MBTI가 T라고 호소하면서 자기는 공감 같은 걸 못한다고, 자기 말문 막히면 "원하는 게 뭐냐"라고 도돌이표 하는 사람들한테, 나라에서 나서서 가르쳐야 해. 정서지능(EQ) 역시 감정이 도출되는 구조를 파악하는 엄연한 '지능'의 영역이라고.
공통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지금 누구보다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 지능이 높다고 자부하면서 정서 지능을 놓치는 건, 엔진은 좋은데 핸들이 고장 난 차를 모는 거고, 그러다 사고가 나면 그건 성격 탓이 아니라 '능력' 부족이라니까.
(2)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는 기만과 어장이 뒤섞인 연프(가령 <솔로지옥>)는 보지 않는다. 트라우마가 깊어서... 반면 <환승연애>를 챙겨보는 이유는 적어도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려 애쓰는 인간의 민낯이 있어서 볼 맛이 있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죄가 아니거든.
진짜 문제는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비겁함, 혹은 연애 그 자체를 위해 사람을 갈아타는 그 얄팍한 목적이 문제다. 하나에 충실하지 못하는 마음은 절대 사랑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