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뭘 잃을 수 있냐구?

어떤 세계, 떠나온 자리

by 도한솔 I Solar


손을 잡고 방방 뛰던 찰나의 온기가, 차가운 대학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우연히 대학로 한복판에서 학교 때부터 친한 배우 오빠를 만나서 얼마만이냐고, 보고 싶었다고 서로를 반기고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뮤지컬 <트레이스 유>, 익숙한 듯 괜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제 그렇게 글은 썼다만, 내가 이 작품을 다 제대로 기억하려나.

하지만 막이 오르자 기억은커녕, 나도 모르게 새로운 연출을 분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 인물은 이런 감정이야'라고 정해둔 듯한 연출 스타일이 내가 생각한 방향과는 조금 달랐지만..., 무대 위 선배님의 연기는 여전히 믿고 봤다. 특히 그 정신이 아픈 신체 연기는 아마 그분이 제일일지도?


많은 것들이 그 지난 시절과는 참 많이 달랐는데도, 커튼콜을 할 때 가사를 다 외워서 부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순간 잠시 열에 들뜬 객석을 돌아보고 눈물이 고였다.


커튼콜 때 쓰라고 대여(?)받은 신문물


이게 다 너무 각인된 추억이라서.
그렇지만 내 자리를 찾은 현재의 내가, 한 때 간절했던 저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 걸 알아서.



위험수위의 규칙과 등가교환의 법칙
Stakes and Principle of
Equivalent Exchange

위험수위 Stakes

1. 모든 살아있는 순간에는 뭔가 잃고, 얻는 것이 있다.
2. 얻는 그 무언가는 잃는 것과 정확히 같은 크기이다.



등가교환의 원리 Rinciple of Equivalent Exchange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두 개념은 동일한 수학적 균형을 전제로 하며, 삶과 연기의 실제적 에너지 구조를 설명한다. 즉, 위험수위와 등가교환은 동일한 원리이다. 차이가 있다면, 등가교환은 “물리적인 법칙”이고, 위험수위는 그 법칙이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는 “무게 있는 현실”이다. 인간의 예술은 이 무게를 세계와 연결하고,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하나가 아닌 ‘둘’ Not one, but "Two"

퍼포머가 하나의 답(“이 감정만”, “이 목표만”)을 찾으면 표현은 마비된다. ‘하나’를 찾는 것은 부질없다. 모든 것을 해결해줄 마법의 ‘하나’란 없다.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엘릭 형제도 “죽은 어머니를 되찾겠다”는 하나의 해답만 쫓다 몸을 잃었다. 즉, 삶과 예술은 언제나 두 힘의 균형으로 성립한다.

낮 ↔ 밤
사랑 ↔ 거절의 두려움
희생 ↔ 구원
끌어올림 ↔ 끌어내림
확장 ↔ 수축
밀어냄 ↔ 끌어당김


데클란 도넬란 「배우와 목표점」
「강철의 연금술사: 鋼の錬金術師」



너는 뭘 잃을 수 있냐구?


나는 이걸 무대 위에서, 그리고 삶에서 똑같이 보았다.


자신의 재능을 물질화해버리면,
그 재능은 소멸되곤 한다.


나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참 어려웠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내 재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만큼 따라오는 보수를 받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왜 그걸 소멸이라고 부르는 거지.

근데 그 말의 뜻을 뒤늦게 알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본연의 것들을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서 깎고, 깎아내 버리면 점점 나는 사라지고 약해진다는 걸. 수화기 너머의 보컬선생님께서 "좀 더 해보지 왜, 아쉬워"라는 말에는 그저 웃었지만, 당시 나는 심적으로 많은 일이 겹쳐 오른쪽 귀가 한 달 동안 들리지 않는 공포를 잊지 못한다.


병원 진료실에서 "일시적인 거라 괜찮아질 거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와르르 무너지듯 감사하다며 울었고, 그리고 결심했다. 이거만큼은 잃을 수 없다고. 나를 지키기 위해 이 길을 멈추겠다고.


참 많은 예술가들이 그 중도 과정에서 깊은 고민과 우울을 앓으면서도 선택을 한다. 사람들에게 노출이 많이 되고 유명해질수록 더 그러하지. 그야말로 등가교환의 법칙. 위험한 수위를 넘나드는 규칙.

그 과정에선 몸과 마음의 건강이 상하기도 하고, 니즈를 맞추기 위해 자존을 버리기도 하고, 아예 이해받는 것을 포기를 하기도 한다.

비단 예술을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 역시 돈을 벌고 살아가기 위해 똑같은 루프를 탄다. 다만 구조와 방식이 다를 뿐.

결국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기에.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 세계에 나를 걸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세계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걸 안다.

삶을 살아가며, 위험수위와 등가교환의 법칙은 언제나 정확했다. 세상 어느 누구나 무언가를 한 차례 얻을 때마다, 그만큼의 나를 잃어온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겪어왔다. 그러고 나서는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잃을 수 없는 것들이 생겼다.


내 곁의 나.

그래서 나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덜 명확하고, 덜 안전하고, 아직 이름조차 붙지 않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동시에 아직 소모되지 않은,
그러나 내 안에 이미 명확한 북극성이 있는 나만의 우주.

누군가는 나에게 그러더라고. 자신에게 이 일이 대단한 'ART'가 아니라 'WORK'라고. 돈을 벌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일이라면서,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그래, 당신의 우주에선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에게서 봤지. 자신이 누군가의 위에 '올라가 있다'라고 믿는 그의 뒤에 있는 내리막길을. 사그라들고 있는 열정과 사랑을.

어떤 세계는 다시 들어가기 위해 기억되는 게 아니라,
떠나온 자리로서만 끝까지 남는 걸.





여담


​신기한 건 내가 달라진 만큼 보이는 것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예전 같았으면 배우들 연기와 노래에만 집중했을 텐데, 춤을 추면서 듣는 뮤직 퀄리티 자체가 달라진 탓인지 뒤편 밴드 사운드(드럼, 기타, 키보드, 베이스)가 팍팍 꽂혀서, 저 소리들을 살려 동선을 이렇게 채우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 머릿속을 스치더라구? (그래서 커튼콜 때 열심히 놈!)




당시의 내 청력은 스테로이드 부작용과 더불어 다시 잘 돌아왔고..., 그래도 오늘 친구하고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농담처럼 "야, 나 복귀(?)해봐?"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거면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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