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본다는 건 뭐냐구?

나를 지우고 세계를 얻는 법

by 도한솔 I Solar


어느 날의 동대문 액세서리 시장(에이치 옷 사러 감)에서 있었던 일인데, 여느 때처럼 물건을 고르고 있던 차에, 사장님의 5살 배기 손자가 칭얼거리고 있었다. 따님인 엄마가 뭘 사주겠다 했던 건지는 몰라도 "두 개는 너무 적어!"라는 주장의 그 오빠(?) 때문에 사장님과 따님께서 어서 가자, 하고 어르고 달래고 있기에, 난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을 톡 건넸지.

"어머, 오빠! 엄마가 두 개나 사주는 거야?
좋겠다, 나는 엄마가 어릴 때 하나도 안 사줬는데!"


그 순간 그 아가는 기분이 좋아져서 헤실헤실 웃으며 엄마를 따라갔고, 할머니인 사장님께서 연신 고맙다 하시더라고. 애들은 보통 물건 개수가 중요한 게 아녜요, 갖고 있는 게 충분한지 아는 게 중요해요. 하고 고른 물건을 계산하려 하니까, 하나는 그냥 서비스라고 주시던 걸?

뭔가 내가 보상을 바랐던 건 아닌데 말이다.




자신의 변화를 보기
Seeing ourselves change


변화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우리의 통제력 밖에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배우가 관객은 '배역'을 보러 오지 않았다 ㅡ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관객은 배우를 보러 온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객은 배우가 보는 것을 보려고 온 것이다. 배우는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그것은 관객에게 부당할 뿐 아니라, 그녀의 창조에 역행하는 것이다.

• 나폴레옹의 결핍과 헬렌 켈러의 충만
​이 원리는 삶의 행복과도 직결된다.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평생 행복한 날이 6일뿐이었다"라고 고백한 반면, 삼중고의 헬렌 켈러는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라고 했다. 차이는 '조건'이 아니라 '주의(Attention)의 방향'이다.


​나폴레옹: 주의가 끊임없이 '자기 상태(권력, 유지, 통제)'로 회수됨.
​헬렌 켈러: 주의가 끊임없이 '밖(사물의 질감, 타인과의 연결)'으로 열려 있음.


즉, 관객은 퍼포머의 내면이 아니라 퍼포머가 보는 세계를 보러 온다. 헬렌 켈러는 자신의 장애를 연기하지 않았고, 오직 세계를 보듯. 그것이 그녀의 삶을 그 자체로 예술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본다는 건 뭐냐구?


이게, 참 신기한 게 뭐냐면 변화는 '의도'가 아니라 '결과'다. 내가 만약 그 아가를 변화시키려(훈육하려) 했다면, 더 떼를 쓰고 울음까지 터뜨렸을 수도 있다. 혹은 내가 뭘 바라고자 해서 그런 행동을 했었으면 사장님께서 본인이 엄연히 파는 물건을 서비스로 주지 않으셨겠지.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바꾸려 애쓰는 대신, 그냥 더 분명하게, 더 즉각적으로 충만한 나를 보게 만들었을 뿐이다.

'어, 나는 있는데 다른 사람은 없어!' 그래서 생긴 변화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아이의 시선이 이동한 결과로 일어난 거지. 관객(할머니)은 내가 얼마나 착한지를 본 게 아니라, 내가 보고 있는 그 '충만한 세계'를 함께 보았기에 기꺼이 그 장면에 서비스로서 합류해 주신 거고.

인지학을 얕게라도 공부하고, 스스로 적용도 해보면서 알 게 된 게... '본다(seeing)'는 것은 망막의 시각 활동이 아니라, 의지가 실린 인식의 사건이랄까. 왜 흔히들, "흐린 눈 한다"라는 표현 쓰잖아. 주의를 기울여줄 가치도 없어서.

결국 주의(Attention)라는 건, 단순히 시각, 청각, 촉각이라는 개별 감각 이전에 존재하는 '영혼의 방향 설정'이다. 자꾸 '자의식'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외부 감각을 내 마음 하나가 전부 감당하기에 다들 너무 취약하기 때문이고.

근데 그냥, 나를 바꾸려 애쓰지 말고, 그저 주의를 밖으로, 방향을 조금만 틀어서 던져보면 된다. 그 주의(좀 더 순한 말로는 관심)가 명료해질 때, 변화는 통제 밖에서 찾아오거든.

변화는 시선이 남긴 흔적일 뿐이니까.

에, 쉽게 말하자면 자의식이 개입해서 "이렇게 춰야지!" "이렇게 톤 내고 고음 뽑아야지!"라고 명령할 때보다, 자의식을 지우고 흐름에 몸을 맡겼을 때 훨씬 더 강한 퍼포먼스가 나온다는 사실. (물론 그러려면 대사와 음악을 도구로 다룰 수 있도록 기본적인 연습과 준비가 필요하지만)

비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에너지를 흘려보내야 할지 몸이 먼저 알거든.

나의 자아를 조금만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면, 눈 뜬 황제 나폴레옹보다도, 더 넓은 헬렌 켈러의 세계를 살 수도 있지. 그런 세계에 단 1분이라도 살게 돼 보면 변하는 게 많아져. 진짜야.


예술은 무대 위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마술이 아니라니까, 정말.




여담


이 상태를 어디서 가르쳐줄 수 없는 이유는 이게 '방법'이 아니라 포기할 줄 아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포기하는 법을 가르쳐줄게"라고 말하잖아?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포기하지?"라며 또 다른 노력(자의식)을 시작하게 되거든(;;)


​그냥, 판단하고 평가하려 들지 않으면 되는 거야. 나 자신을 아기라 치면, 아기가 칭얼댄다고 해서 '버릇없다'라고 단정 짓거나 비난하지 않는 정도의 마음. 딱 그 정도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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