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망가짐을 향하여
사람들이 나에게서 발견하는 의외성 중 하나는, 내가 진심으로 '소녀 취향'인 구석이 다분하다는 거다. 특히 아이돌(성한빛나!)과 마법소녀물. 내 겉모습만 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며 놀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로리타풍 옷을 입거나 3인칭으로 나를 부르며 사는 건 결코 아니다.(;;)
카드캡터 체리부터 세일러문, 클램프 시리즈, 꼬마마법사 레미, 달빛천사 등등..., 이게, 근데 있잖아. 내가 이 장르들을 좋아 하는 이유는 화려한 변신이나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적 서사 그 너머에 있다. 이 모든 건 결국 '소녀들의 성장기'이기 때문이다.
그중 나한테 많은 영감을 준 CLAMP의 <기동천사: 엔젤릭 레이어>. 이 작품 속 '엔젤'이라는 인형 로봇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다. 플레이어(데우스)의 뇌파와 동기화되어 움직이는 엔젤은, 플레이어의 신체 특징과 정체성,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나'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그대로 투사한다.
주인공 미사키의 엔젤 '히카루'가 점점 더 강해지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부풀리거나 꾸미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투사했을 때, 레이어와의 싱크로 손실도 적다. 그렇게 다시한번 작품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어? 이거 현실에서 가능할 거 같은데."
이 사소한 영감은 연습실과 서촌 골목에서의 끝도 없는 실험을 거쳐 나의 [안무 철학 노트]가 되었다.
안무 철학 노트
choreography philosophy
1. 움직임 철학
• 몸은 기억의 도서관이다.
나의 몸은 내가 지나온 감정, 관계, 시간의 조각들이 아카이빙된 공간이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기억이며, 기억이 언어가 된다. “움직이지 않고 견딜 수 없는 감정”만이 움직임이 된다. (충동의 영역)
• 움직임은 언어이고, 침묵은 쉼표다.
말하지 못한 것들을 말하기 위해, 몸은 언어가 된다. 구조와 해체, 즉흥과 반복, 끊어짐과 연결, 동시에 모든 동작 사이의 쉼, 숨, 정지 역시 나의 문장부호이다.
• 현대무용은 나의 몸에게 허락된 자유다.
감정을 강조하거나 형식에 가두지 않고 흘러가게 두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움직임은 슬픔도 기쁨도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현대무용은 “내가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내가 설 수 있는 언어”로 바꿔준다.
2. 리듬과 즉흥에 대한 개념
• 리듬은 구조다.
감정은 흐르고 변하지만, 리듬은 흐름을 지탱하는 골조다. 내가 흐트러지지 않으려면 내 리듬을 지키는 감각이 필요하다. 안무에서의 구조는 감정을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흐르게 하기 위한 배수로”. 구조 안에서 감정은 안전하게 망가질 수 있다.
• 클로즈 리듬 훈련은 ‘희생 없는 교류’의 훈련이다.
감정적으로 동기화되지 않고, 구조적으로 연결되는 법을 배운다. 나를 잃지 않고도 타인과 춤출 수 있다. 안무가는 에너지와 서사의 흐름을 만드는 안내자, 나 자신을 움직이는 동시에, 타인의 마음도 움직인다.
• 즉흥은 감정의 마찰음이다.
움직임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잔향이다. 즉흥은 감정이 지나간 뒤 남는 입자들을 흡수하고 휘젓는 일.
3. 춤은 나 자신의 “무장 해제”다.
•나를 아프고 무너뜨린 사람들 앞에서도 춤출 수 있게 되면, 내 몸을 지키는 기술보다 내 감정을 언어로 전환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춤은 침묵이자, 외침이다. 결국, 안무는 살아낸 증거이며 무대에 서는 이유다.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뭐냐구?
이걸 무대와 연습실이라는 '레이어' 위에 그대로 올린다. 그리고 미사키가 히카루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듯, 이 '몸'이란 게, 단순히 움직이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이 투사된 현실의 엔젤인거지.
마법소녀들이 입는 화려한 의상이 '형식'이라면, <엔젤릭 레이어>의 싱크로나 움직임은 '본질'이고. 감정을 강조하는 어거지의 변신이 아니라, 내 몸에 허락된 자유라는 의상을 입는다고 해야할까?
진짜 쉽게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전히 오른쪽 어깨와 왼쪽 고관절 안 좋은 상태인데, 예전에는 이를 '극복해야 할 결함'으로 봤었거든.
이제는, "그냥 이런 몸인 나"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 그것이 싱크로율을 높이는 핵심이다. 부상 뒤에 찾아오는 재발의 두려움(트라우마) 역시, 내 엔젤이 가진 현재의 데이터랄까.
결국 미사키가 점점 더 히카루와 함께 강해진 것도 "자신의 리듬"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구조 안에서 안정감을 찾은 것처럼, 나 역시 내 약점과 강점을 있는 그대로 구조(연습실, 음악, 상대 댄서나 배우, 내 신체 상태) 안에 놓아주는 거다.
감정은 행동의 결과값일 뿐이니 몰두하지 않고, 그 순간 나는 그냥 안전하게 망가질 뿐.
"아니, 근데 맨날 똑같은 음악, 대본, 안무가 지겹고 매너리즘 오면 어떻게 해?"
음,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한 때 그랬으니까 할 말 없긴 한데) 몸이라는 게, 어제와 오늘 똑같다고 생각하냐 물어볼까? 어제 마신 커피와 오늘 마신 커피가 다르듯, 침묵과 무음 속에서도 매번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걸. 비단 예술이 아니라도 삶에서도 그래.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도 많은 게 달라지거든.
모든 마법과 움직임은 결국, '어제의 나'를 투영해서, '오늘의 내 몸'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니까.
여담
난 정확히 말하자면 안무라는 걸 짜는 사람은 아니기는 하지만..., 프리스타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형태'가 되는 쪽에 가깝다. 가끔 어떤 댄서들이 "어떻게 그렇게 감정 표현을 하느냐"라고 물을 때가 있는데, 단 한 순간도 "이 감정을 보여줘야지!"라고 결심한 적이 없어서 조금 설명이 난감했다.
근데 이걸 진짜 개념화를 잘 한 게 사도쌤 수업이었지, 결국 "자기의 춤을 춰야한다"는 그 말이 도움이 정말 많이 됐어.
가끔 억울한 게... 얼마 전엔 스물세 살 같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이건 자랑 맞음), 왜 사람들은 내가 아이돌이나 이런 보송한 걸 좋아한다고 하면 "의외"라는 걸까? 뭐, 하긴 매치가 안 되면 좀 어때? 내가 내 취향을 보면서 만족하면 그만이야. (제베원 해체하지마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