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frame)에 대하여
최근 있었던 웃긴 일화를 이야기하자면..., 나는 디저트를 참 좋아한다. 한 달 전쯤 자주 가기 시작한 카페에서 딸기케이크를 보고 '케이크가 참 크네요.'하고 감탄했는데, 그때 직원분이 당황을 하셨다. '왜 그러시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나중에 단골로 얼굴 도장을 찍고 나서 그때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는 말이 '왜 이렇게 케이크가 커요?' 라고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거의 매일같이 방문해서 표정도 없이 케이크 시키는(특: 싹싹 비움) 나를 보며 사장님께서 "참 특이한 사람이 다 있다"라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한다(...)
그래서 설명했지.
그날은 유난히 피곤했고, 요즘 전반적으로 생각이 많고 체력이 약한 시기였고, 감정을 아끼는 편이라 표정이 적었을 뿐이라고. 상황을 조금 풀어 설명하자 “아, 그랬구나” 하고 오해는 자연스럽게 풀렸다.
사람들은 각자 취향을 가지고 있다.
좋아하는 색, 동물, 목소리, 옷의 질감. 비슷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같은 경우는 없다. 우리는 그 차이를 묶어 ‘개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결국 어느 정도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고, 그 비슷함은 관계가 되고 집단이 된다. 문제는 그다음, 집단은 효율을 위해 사람을 빠르게 읽고, 빠르게 역할을 붙인다. 내부가 아니라 외형, 분위기, 말투처럼 가장 먼저 닿는 정보들로 말이다.
그걸 흔히 ‘주파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양자역학에서는 ‘얽힘’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우리는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익숙한 틀로 해석한다는 것.
일단, 자기 객관화를 조금 해보자면...,
나는 키가 170cm이고, 표정이 적고, 차분하거나 차갑게 보이는 여성이다. 그래서 이미지만 놓고 보면 종종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된다. 설명하는 역할, 정리하는 역할, 감정을 덜 드러내는 위치. 이건 의도적으로 연기한 무표정이 아니다. 그저 에너지를 어디에 쓰는지를 선택할 뿐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종종 그 선택을 태도로, 의도로, 심지어 공격성으로 오해한다는 점이다.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서 보면 흔히들 나에게 '분위기 맞춰라', '너 나한테 불만 있냐'라며 화를 내는 상황도 있곤 했는데, 하지만 그 오해는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읽는 방식— 즉, 그들의 목표점에서 발생한 결과다.
틀
Frame
이야기와 자유 The story and freedom
현명한 배우는 관객이 보는 것을 통제하지 않는다. 목표점은 발견되고 보여야 한다. 그것이 전부다. 목표점은 연기를 하기보다는 자극(impulse)을 생성한다.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목표점을 보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지 배우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장면의 모양은 살아있고 움직이며, 틀은 목표점들의 변화는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바람과 바다가 모래의 모양을 만들어낸다. 해변이 홀로 스스로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의 도정 The backwards path
이 여행에서는 인내심이 필수다. 의지만으로는 참을 수 없어 즉흥이 되거나 노력해서 어떤 다른 상태를 구현할 수 있다. 인내심은 미덕이고 우리는 이것의 방문을 막지 않을 정도로는 현명하다. 특히 자아비판은 그것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자아비판을 통제할 수 있지만, 인내심과 자유로움은 쉽게 통제할 수 없다. 참을 오늘 참을 수 없을 때 바닥을 치고 실패할 것이다. 차라리 우리 스스로를 혼내는 것이 스스로에게 인내심을 가지는 것보다 쉽다. 그러나 배우의 끝나지 않는 탐구는 “내가 어떻게 보이지?”에서 “내가 무엇을 보지?”라는 역으로의 도정이다.
목표점에 관한 법칙들은 안전할 때는 우리가 그것들을 생각하고, 위험에 처했을 때는 그것들을 사수할 때만이 유효하다. 목표점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목표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점은 우리의 가장 극단적인 의심들보다 강한, 파괴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고립(isolation)은 또 다른 이론일 뿐이다.
첫째, 항상 목표점은 존재한다.
둘째, 목표점은 외부에, 일정 거리를 두고 존재한다.
셋째, 목표점은 당신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전부터 존재한다.
넷째, 목표점은 항상 구체적이다.
다섯째, 목표점은 항상 변한다.
여섯째, 목표점은 항상 능동적이다.
ㅡ 데클란 도넬란 〈배우와 목표점〉 중
그러니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뭐냐구?
나는 나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랄까. 연기를 할 때도, 춤을 출 때도, 글을 쓸 때도, 심지어 그림을 그릴 때도, 일상을 살 때도 그 법칙이 변하지 않는다.
내 안의 감정을 꺼내 전시하는 대신, 그냥 그 목표점을 다트판처럼 세우고 그쪽을 본다. 그러면 반응이 생기고, 움직임이 생기고, 장면이 만들어진다. 그건 내가 '연기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그냥 '보고 있어서' 생기는 뭔 가지.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 말대로면 예술은 다 형식이 있고 틀이 있는데?"
근데, 우리 맨날 그러고 산다니까?
나는 보여주려고 한 적이 없다. 그저 보고 있었을 뿐이다. 케이크를, 그날의 피로를, 말할 힘이 없는 상태를. 그래서 그 순간은 당황이었고, 나중에는 감탄이 되었고, 지금은 웃긴 이야기로 남았다.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내려놓고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로 방향을 바꾸는 순간, 오해는 설명 가능해지고 관계는 느슨해진다. 강박은 줄고, 여유가 생긴다. 이건 연기, 춤, 노래, 그림 등등에서도 다 적용이 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춤을 출 때 "나는 세계적인 댄서처럼 보여야 해"라고 생각한다고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연기를 할 때도, "나는 사이코패스 연기 중이야"한다고 그렇게 안 보인다. 그냥 그런 '척'하는 거지.
그저 보는 거다.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관객을, 상대 배역의 움직임을, 내가 쓸 수 있는 공간을, 몸의 방향과 한계를, 음악의 비트와 호흡을, 공기의 건조함을.
그리고 '조금 더 나은 버전의 나'는 뭘 하고 있을지를.
나한테는 그게 틀(frame)인데?
물론 말이 쉽긴 하다. 나 역시 꽤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눈치를 과도하게 보며, "내가 어떻게 보일까"에 억눌려서 살아왔던 입장에서..., 이게 하루아침에 바뀌는 문제는 아니다.
근데 진짜 한 번 해보면 점점 더 쉬워진다. 이미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하고 있는 구조인데, 뭐. 내가 뭔가를 더 보태지 않아도 모든 게 흘러간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그에 반응하며 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