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럼 뭘 얻고 싶냐구?

어떤 진리, 통과하는 자리

by 도한솔 I Solar


이번 크리스마스이브, 명동성당에서 보낸 시간은 차가운 공기에도 활기찼다. 각종 플리마켓부터 연주회, 소원 트리​. 그 소란함 사이로 조만간 대모가 될 분의 요청으로, 대자녀 선물로 줄 묵주 색깔을 함께 골라드리며 낯선 온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곳은 어느 홀에서 상영되던 무료 성탄 연극, <네 번째 동방박사>.


​세 명의 박사가 아기 예수를 찾아 떠날 때, 네 번째 박사인 '알타반' 역시 보석 세 개를 들고 길을 나선다. 하지만 그는 여정 내내 굶주린 노인, 병든 아이, 노예로 팔려가는 여인을 외면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아기 예수에게 바칠 예물을 그들을 구하는 데 다 써버리고, 심지어 스스로 노예로 팔려가기를 자처하며 33년의 세월을 고된 세월 속에서 보낸다. 빈손이 된 노인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비로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만난다.



"네가 그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무대 장치는 소박했고 그 어떤 상업적인 화려함도 없었다. 관객들도 2,30명 남짓. 하지만 나는 공연 내내 이상할 정도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적(예물 바치기)을 상실해 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진정한 구원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마지막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탁- 하고 풀려버렸다.



'아, 와닿았다.'

그것도 아주 깊숙하고도 너그럽게.

내가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할 마지막이자 시작의 허들.


Sacrifice, 희생





내면이 아닌 외부 Not the inside, but the outside

퍼포머는 인물의 속을 들여다보는 대신, 인물을 통해 외부 세계를 보는 것으로 위험수위를 발견해야 한다. 그들의 시선은 마치 인물이 투명한 듯이 인물을 꿰뚫어야 한다. 마치 인물이 가면인 것처럼 말이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인물들의 위험수위 역시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서 규정된다.


에드의 위험수위: 죄책감 그 자체가 아니라 동생의 몸을 되찾는 것.
스카의 위험수위: 개인적 분노가 아니라 이슈발의 멸망과 국가의 폭력.


즉, 위험수위는 인물이 바라보는 세계 속에 걸려 있는 것이다.


여정: 등가교환을 넘어서는 순간 The Journey through


퍼포머: 인물을 통해 외부 세계와 맞붙는 위험수위를 보여야 한다.
에드: 자신의 모든 능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알을 되찾으며, 단순한 등가교환을 넘어선다.


이 순간 표현도, 서사도 살아있는 진실이 된다. 즉, 위험수위와 등가교환은 동일하며 ‘둘’의 구조만이 인물을 살아있게 한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위험수위를 발견해 낸 이 여정은 곧 엘릭 형제의 영적 귀환. 모든 삶과 예술은 처음에는 균형(등가교환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법칙을 깨는 순간, 진짜가 탄생한다. 예술과 한 인간의 삶, 세계를 투명한 통로로 살아 바람의 진리를 보는 것이 이 여정의 목표이다.




너는 그럼 뭘 얻고 싶냐구?


인간은 누구나 에고(Ego)를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 안의 무형의 것을 유형의 것으로 증명해야 하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 에고의 가면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분명 내가 좋아해서 선택한 이 일이 나를 끝없이 괴롭고 숨 막히게 하기도 한다.


인정받고 싶어서, 뺏기고 싶지 않을수록 에고의 가면은 점점 두껍고 정교해지고 어느 순간 그 가면이 나 자신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희생이라 믿지만, 세상은 1을 주면 1을 받는 '등가교환'으로 움직이는 듯한다. 손해 보고 싶지 않고, 딱 받은 만큼 하면 쉬우니까. 안전하고도 죽어있는 상태.


그런데 내가 본 그 연극 속의 '희생'은 달랐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보석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예물들을 세상에 흩뿌림으로써 자신이라는 존재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내가 나를 지키려고 애쓰는 손아귀를 풀 때, 비로소 진리가 그 통로를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어린 에드는 죽은 어머니를 살리고 싶다는 순수하고도 미련한 집착 때문에,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잃게 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었다면 내면의 우울과 결핍에 미쳐버렸을 상황에서, 하나뿐인 동생 알의 몸을 되찾겠다는 외부의 목적지로 향한다. 그리고 그 목표가 여정을 떠나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자신의 동생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전부인 '연금술'이라는 진리의 문을 과감하게 포기하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기적을 일깨운다.


"연금술이 없어도 모두가 있거든."


그 미소는 공연이 끝나고 구석에서 정리를 하고 있던 네 번째 동방박사 역의 주연 배우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그저 자신의 몸을 통과시켜 그 너머의 진리를 보는 사람의 담백함. 내가 나를 증명하려는 마음이 아닌, 그저 그 순간에 자신을 맡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개운함.




​이걸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는 '세상을 꽉 쥐고 있는 손아귀를 푸는 것(제6법칙)'이라고 하는데, 이걸 조금 쉽게 풀어보자면..., 우리가 각종 연습생 경연프로그램이나 스트릿우먼파이터 시리즈 같은 걸 보면 뭔가 참가자들이 몸에 힘을 너무 많이 줬거나, 세상을 향해 "나를 인정해!"라고 꽉 쥐려 할수록, 세상이라는 거울은 "너는 아직 부족해"하게 되는 걸 생각해 보면 된다.


연습실에서도 거울 속 내 모습이 맘에 안 든다고 시선 돌리면 동작이 흐릿해지듯이, 세상이 거울이라고 치면 "나는 이미 완성된 무대 위에 있다"라고 하면 되려나. 모든 근육에 힘주고 있으면 고음도 안 나고, 점프도 못하듯이 그냥 그 꽉 쥐고 있는 자존심이나 계산 이런 걸 눈 딱 감고 놓으면 좀 더 유연해지는 거지. 그러면 음악도 더 잘 들려서 퀄리티도 살던 걸.


이건 결코 무대 위에 서는 예술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자기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퍼포머니까.


자신의 내면의 성과에 집착하는 대신 이 업무가 세상에 줄 가치(외부)를 보고, 나를 증명하려 애쓰는 '나'를 잠시 투명하게 치워두면, 그 빈자리를 통해 세상의 기회와 타인의 진심이 통과해 지나간다.

그게 바로 가장 너그러운 형태의 희생, 그리고 가장 영리한 형태의 획득.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거지. 나를 '표현'하는 것에 집착하는 대신, 나를 '통로' 삼아 세상의 위험수위를 보여주면 훨씬 편해질 거란걸.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나를 봐주는 관객이라는 거울 앞에 "나는 이미 그런 상태야"는 담백한 미소로 서 있어 보면, 그 관객은 나를 통해 흐르는 그 순간의 진실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내가 나를 증명하려는 손아귀를 풀 때,

비로소 나라는 우주는 제한 없는 가능태(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흐름으로 가득 차기 시작할 테니까.




여담


사실 양심 고백하자면, 나는 그리 신실한 신자가 아니다. 먹기 전 기도도 잘 안 하고, 성당 근처에도 안 가는 날이 허다한 걸. 다만, '진정한 사랑은 희생이 뒤따른다'는 궁극적이고도 보편적인 가르침 하나만큼은 잃지 않고 살아가려는 거야.


그 '사랑'이라는 건, ​가족, 애인, 친구, 애완동물... 누구한테든 해당이 되겠지만, ​뇌과학적으로 사랑은 타인에게로 '나'라는 개념을 확장하는 일이라더라. 결국 사랑하는 대상은 나를 비추는 거울인 셈인데, 내가 보는 세상이 곧 나라면, 이왕 하는 거 좀 멋지게 확장해보고 싶잖아?




​아, 근데 오해는 금물. 여기서 말하는 '희생'은 나를 착취하려 드는 이들에게 갖다 바치는 '호구짓(!)'이랑은 아주 많이 달라요. 그런 놈들 만나면 필사적으로 피하고, 진짜 가치 있는 곳에만 나를 통과시켜야 해. 내 에너지는 생각보다 귀하니까.

이걸 어떻게 아냐고요?

휴,... 총 6편이나 이런 글들을 어떻게 쓸 수 있었겠어(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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