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니까?
7년 전 계절학기 때, 연기를 가르쳐주셨던 한 남자배우가 한 번씩 떠올랐었다.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분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작품들을 줄줄이 해온 베테랑, 동시에 뼈대 있는 종갓집 종손으로서 일 년에 제사만 스무 번 넘게 모셔야 하는 배경을 가진 사람. 그 집안의 무게가 그에겐 자부심인 동시에 거대한 족쇄였을 것도, 그때는 얕게, 지금은 마음으로 이해하지. 그는 수업 때마다 학생들에게 배우는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하며, 그만둘 수 있을 때 그만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꽤 단호하게 말하곤 했다.
어느 날은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 친구들과 내기를 했다가 장난 삼아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했는데, 55등급을 받았다는 이야기. 남자 배우는 경제력과 안정감이 부족해 점수가 낮지만, 반대로 여자 배우는 외모와 끼 덕분에 점수가 높다는 논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구름의 모양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배우들은 결혼을 하면, 그 높은 등급의 남자들이 배우라는 직업을 그만두길 바란다고. 우리는 끼를 팔아서 먹고사는 직업인데,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가 사람들 앞에서 끼를 파는 걸 원하겠느냐고. 내가 그 말을 듣자마자 학생들 틈에서 (ㅍ"ㅍ) 이런 표정으로 대꾸했다.
"와, 저는 그럼 결혼은 안 해야겠어요!"
본인도 결혼하지 않으셨던 분이었는데, 내 말에 그는 그건 또 너무 확고한 생각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도 자신이 외골수인 걸 인정하지만, 도한솔 학생 또한 본인의 틀이 강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남들도 옳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훈계였다. 그는 유독 그 시절 나에게 날 선 코멘트를 많이 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굳이 꺼내어 내던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분의 20대 시절 전 여자친구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내가 그 여자배우와 찰나로 닮았다는 말을, 그 시절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도. 그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아, 당신도 결국 인간이라서 그랬구나.'
하지만 그런 잣대로 치면,
도대체 뭐가 좋은 직업이고 뭐가 옳은 사고방식일까?
11등급이든, 55등급이든, 99등급이든.
9 to 5로 출근하는 직장인이든, 길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예술가든.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최근 뉴스에 터져나오는 엡스타인 파일 파문을 보라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던 이들이 얼마나 추잡하게 굴어왔고,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그 권위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그래, 나는 틀(frame)이 강한 사람이 맞아.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조금 더 나은 나 자신'은 그런 가치 체계에 걸려 있지 않은 사람이다. 이건 내가 옳기 때문에 남들도 옳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거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옳다고 믿으니까, 나에게 당신의 아집을 들이밀지 마!"
물론 우리는 서로 다른 경험과 시간으로 만들어진 우주들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맞춰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는 투명성에서, 나 자신과의 연결과 믿음에서 비롯되는 걸.
그리고 내 의식의 수준이 곧 나의 가치가 될 거라고 믿는다.
우러러보던 이들이 추락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발로 딛고 선 땅을 보게 된다.
세상은 돈과 명예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유혹하고 있다. 그렇지만 쏟아지는 뉴스와 미디어 속에서 가장 부유했던 자들이 끝내 갈구한 것은 결국 '순수함'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고도 슬픈 일이지 않아?
그러니까, 내 이름이 괜히 Solar겠어.
난 정해진 궤도를 도는 위성이 아니잖아.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 열기가 될 건데, 뭐.
※ 연재 완결을 하려면 세 편은 더 써야한다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세 편은, 내게 영향을 줬던 분들의 커리큘럼과 철학을 토대로 외전을 쓸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