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는 사소한 용기가 있어야 해

<키다리 아저씨> with Audio

by 도한솔 I Solar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0906 맥브라이드 캠프.

<키다리 아저씨> 낭독

[9월 6일, 아저씨께,
아저씨, 아저씨의 편지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어요. 제가 여기 오는 걸 반대하고 싶으셨다면 이 주일 내에 비서를 시켜서 알려주셨어야죠. 아시다시피 전 여기 왔어요.

이미 닷새나 지났네요. 숲이 정말 멋지구 캠프도 그래요. 날씨도 그렇구 맥브라이드 일가도 마찬가지고 온 세상이 그래요. 정말 행복해요!

어, 지미가 카누 타러 가자고 부르네요?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의 뜻을 거역해서 죄송하지만 제가 놀고 싶어 하는데 왜 그렇게 못하시려고 고집을 부리세요? 여름 내내 일했으니 2주일 정도는 놀 자격이 있잖아요.

아저씨는 참 불독 같은 분이에요. 하지만 아저씨의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합니다.
제루샤 올림.]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내가 꽤 어린 소녀였고, 마지막 엔딩이 영 이해가 되질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끝맺음을 납득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책은 고아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소녀 주디 (제루샤 애봇)가 정체를 숨긴 '존 스미스'라는 가명의 후원자에게 글솜씨를 인정받아서, 그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된 후, 그에게 쓰는 정기적인 편지들로 내용이 이어진다. 주디는 그 익명의 후원자를 자기식대로 '키다리 아저씨'(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길어서)라고 부르며 매달 재기 발랄한 편지를 써 내려간다.

주디의 편지에서는 주디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어떤 생활을 하고, 어딜 놀러 가며, 무엇을 깨달아나가는지, 또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가 담겨있다. 글자만 딱 읽는다면 온전히 주디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읽는 이인 '키다리 아저씨'의 입장에서 이걸 유추한다면 어떨까? 그럼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편지 속 주디의 시점에서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 친구 줄리아의 삼촌 '제르비스'(저비 도련님)와 샐리의 오빠 '지미 맥브라이드'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는 이해 못 했어도 지금에 와서는 참 흥미로운 지점이 된다.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를 하자면,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는 바로 제르비스. 그는 편지를 읽다가 결국 조카를 본다는 명목하에 주디를 만나보기 위해, 그녀가 다니는 대학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그리하여 주디와 좋은 사이로 지내지만 끝까지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편지에 유추되는 다른 어린 남성 지미의 존재를 자꾸 신경 쓰고, 키다리 아저씨의 이름하에, 그녀가 자주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반대하여 방학 때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있는 록윌로우 농장으로 가라 하는 유치한(?) 짓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자신의 성찰과 힘으로 점점 더 단단해지고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주디. 주디가 솔직 발랄한 편지를 썼음에도, 많은 돈을 후원함에도, 제르비스는 주디를 다 알지도 못하고,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게 된다.

그도 그럴 게, 제르비스는 솔직하지 못했거든. 편지를 다 읽고 그녀의 마음을 볼 수 있음에도 자신의 신념이라는 고집 때문에, 혹은 그녀가 실망할까 봐 4년의 시간 동안 답장을 못했지.

그래서 자신 또한 제르비스로서는 그녀와 잘 지내면서도, 그녀의 진짜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결국, 주디는 '키다리아저씨'가 졸업식에 와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에도, 솔직한 '키다리아저씨'의 정체를 제르비스는 계속해서 숨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청혼을 했지만 거절받았고, 그 모든 것도 자꾸 자기 식대로 오해했지. 그리고 막판에 그는 키다리아저씨로서 주디에게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닫는다. 주디의 편지를 그토록 열심히 읽어왔고, 결국 주디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가로막았던 건, 솔직하지 못한 자신이었다는 걸. 자신이야말로 주디의 약한 면모를 제대로 보지 못한 바보였다는 걸.




<키다리 아저씨> 낭독 (2)

[아저씨도 누군가를 사랑해 보셨겠죠, 그런 경험이 있다면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또 경험이 없다면 제가 설명할 수가 없을 테고요. 어쨌든 제 기분은 그래요 그러면서도 그분의 청혼을 거부했어요, 그이에겐 이유는 말하진 않았어요.

그냥 멍 하고 속상했어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는 제가 지미 맥브라이드랑 결혼할 거라고 오해하고 떠나버렸어요. 지미와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지미는 아직 결혼할 만큼 어른스럽지 않거든요. 하지만 저비 도련님과 저는 오해의 늪에 빠져버렸고 서로 마음을 상하게 했어요. 제가 그를 보낸 이유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그가 장래에 후회할까 봐요, 그렇다면 저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저처럼 가족 없이 산 사람이 그런 가문으로 시집가는 게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에게 고아원 얘기는 안 했어요. 제가 누군지 모른다고 설명하기가 싫어서요.

제가 너무 지독한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의 가족은 자긍심이 높아요. 하긴 자긍심이야 저도 상당하죠.

그에게 가서 문제는 지미가 아니라 존 그리어 고아원이라고 설명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일까요. 큰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차라리 평생 슬프게 사는 편이 낫겠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최근, 한 남자 지인의 연애고민상담을 들어주면서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렇다면 왜 여자들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을 하느냐고, 왜 솔직하지 못하냐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해줬다.


"그쪽을 좋아하는 만큼 내가 나도 좋아하기 때문에 ''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요. 그건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그런 약한 마음을 남자로서 못 알아주는 거야."

이것저것 은연중으로 해보라고 하면, 전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하고 쩔쩔매는데 상대한테는 그걸 바라는 게 결국 사람이면 똑같이 바랄 수밖에 없다는 걸 왜 모를까 싶기도 하고.

제르비스는 분명 좋은 남자다. 그 시대 때야 14살 차이 나는 건, 뭐... 큰 일이었겠냐 싶으니 이건 넘어가고. 주디를 위해 끝까지 후원해 주고,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많은 물심양면을 아끼지 않았지.

그렇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미숙하면서도, 아직 한참 어린 주디 스스로도 깨달아나가지 못했던 부분도 놓쳐버리곤 한다. 그 스스로도 미숙한 부분이 있단 걸 자존심 때문에 직면하기가 두렵거든.

그래서 편지 속 등장하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애에게 그렇게 질투를 하기까지 하는 거겠지. 결국 이 편지는, 겉보기엔 주디의 성장 소설이지만, 동시에 제르비스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는 사소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음만 간다 해서 주디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다는 건.... 제르비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 되었으니.

이 유머러스하고, 똑 부러지고, 진취적인 제루샤의 편지를 결국 연애편지로 만든 건, 제르비스 스스로의 마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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