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꿈에서 깬 것뿐이야ㅡ

달고 폭신한 카스텔라와 함께 묻어두는 긴 잠

by 도한솔 I Solar


곧 있으면 있을 할머니의 두 번째 기일.

그래도 설을 맞이해서 차려진 제사상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옆 자리에 에이치를 놓고는 웃었다. 병실에서 보고 웬 코끼리냐고 만지작거리며 웃으셨어서 매년 데리고 오곤 한다. (그때 귀여워하셨던 기억에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날, 비슷한 크기의 빨간 말 인형을 조물 거리시라 선물로 드렸었는데.) 이번 설에는 좋아하시던 카스텔라를 깜빡한지라 제사 때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뮬랭 듀 몽드


인생의 큰 풍랑이 닥치면 사람들의 진짜 지형도가 그려진다.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방식에서 그가 보고 있는 세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날 전후로, 그 바람과 파도가 만드는 지도를 너무 선명하게 보고 말았다.






그런 것 아는가?


어느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겨왔던 사람 내면에서 내 슬픔과 고통을 내심 기뻐하는 게 보일 때의 참담함.

"어쩌면 너는 내가 필요해서 내게 돌아올지도 몰라."


어느 누구보다 믿어왔던 사람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을 때의 외로움.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야? 왜 너는 내가 우선이 아니야?"


어느 누구보다 존중을 안다 생각한 사람이 보인 침묵에서 느껴지는 권위적임.

"안타깝고 마음 아프지만, 나는 지금 내 입장이 더 중요해."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화살은 단 한 사람을 향했다. 이 모든 아픔은 너의 존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너는 나의 힘듦을 알아야 한다고.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 나는 그때 알았다. 내가 숨 쉬고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끝끝내 버려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마주해도,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패턴이 한결같았다.


"네가 나에게 돌아오는 거지,
내가 너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어야만 한다."



그 모든 순간, 내가 바란 건 정말 사소한 것들 뿐이었다.

모성애의 상징인 손바닥 안쪽보다도 작은 코끼리 키링,

"죄송한데 그 코끼리 인형, 제가 버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 찾아는 볼게요, 근데 없-을 거예요."


내 이름을 내가 정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

잠시간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짧은 진솔함.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데 왜 오질 않아? 왜?"


예전에 선생님께서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당일, 어머니께서 그 모든 감정을 견디고 방송을 해야만 했던 그 이야기를 꺼내며, '왜 이런 일을 너까지 하려고 하느냐'라고 하셨다는 그 진심을 내가 6년 전 수업 때 듣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그 모든 순간에서 어떤 선택을 했었을까?


​그 무심한 태도들이 비로소 나를 깨웠다. 마지막 순간까지 저들이 보는 건 내가 아니라, 오직 거울 속의 자기 자신 뿐이라는 것을. 첫 번째 기일 직전,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내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고 가셨다.


그러니 돌아보지 말고, 이 모든 건 긴 꿈이었다 생각하고 떠나가라고.





이번 설, 늘 머리맡에서 나를 지켜주던 15cm 코끼리 에이치를 처음으로 얼굴 옆에 눕히고 잠에 들었다. 새삼스레 6년을 함께 살아왔지만 이 손바닥만 한 작은 인형이 참 보들보들하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건 없으니까.


"오늘만큼은 나를 지켜주지 않아도 돼.
너도 자."


짧은 토닥임 끝에 분홍색 볼터치에 닿는 나의 작은 입맞춤. 토이스토리 세계관을 믿는 나는 알아. 아마 내가 잠든 틈에 너도 나를 토닥여주리란 걸.

코끼리는 아주 착하고 똑똑한 동물이잖니.


Elephants


이제 나는 꿈에서 깨어났고, 내 곁엔 나를 사랑해 주는 작은 너와 함께 꿈도 없이 잠들래.

달고 부드러운 카스텔라 같은 잠을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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