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께 남기는 퇴사 편지
하지입니다. 이십사절기 중 가장 해가 긴 시기로, 습함과 무더위로 점점 잠들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흘림 땀방울에 대한 걱정과 여름휴가에 대한 설렘이 공존하는 날들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올해의 하지는 줄곧 고민하던 면직이 현실로 이루어진 날입니다. 저는 지난 6월, 약 3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퇴사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면서 봄에서 여름이 되었습니다. 풀리지 않는 고민 때문인지 한 계절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봄에는 회사 옥상정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옥상 분수대의 시원한 물줄기를 보며 머리를 식혔습니다. 더워지기 전에는 마지막 기회인 양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햇볕을 쬐었습니다. 슬슬 더워질 때쯤 정든 분들과 한 분씩 만나 시원한 음식을 먹으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올해 봄여름은 저를 생각해 주는 동료들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정든 분들께,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퇴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무척 당황하시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무모하고 대책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웃으면서 퇴사 얘기를 꺼내는 제가 아주 철없어 보이시겠지요. 특별한 계획이 없다는 얘기를 당당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어이없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마냥 철없기만 한 결정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요즘만큼 제 인생에 대해 많은 시간을 쏟으며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진심으로 무언가를 원했던 적이, 도전하기 위해 용기를 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평균에 속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늘 생각했고 그러기를 바랐으며,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안전하고 무난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새로운 일에 도전할 용기도 없었으며 그렇게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나름 제 직업을 좋아했습니다. 힘든 일도 많고 저에게 딱 맞는 일은 아니지만 좋은 동료들과 좋은 일을 하며 자부심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매일 퇴근 후 취미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놀러 갈 수 있는 일상도 저에겐 소중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직업을 선택한 저 자신은 그렇게 좋아하지 못했습니다. 왜 더 많은 경험을 해보지 않고 도전해 보지 않았는지 후회되었으며, 취업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급하게 진로를 결정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본인의 직업을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질투심도 느꼈습니다. 용감하게 도전하고, 힘든 길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멋진 사람들을 보면서 열등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세상 모든 사람이 나보다 나아 보였고, 그 사람들과 나는 무엇이 다른 것인지 비교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대략 60년, 퇴직까지는 대략 30년 정도일까요. 남은 시간을 이렇게 누군가를 질투하고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살기에는 인생이 아깝다고 느껴졌습니다. 저 자신을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아직 이렇게 젊은데, 벌써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가끔 살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누구보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비록 열등감 덩어리이긴 하지만 저는 저를 누구보다 아끼고 있습니다. 그런 저 자신에게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경험은 다 해보고 죽기 전 후회하지 않게 해주고 싶습니다. 지구에서 태어난 저에게 더 큰 바람과 햇볕을 느껴보게 하고 싶고,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더 넓은 마음을 갖게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저에게 더 다채로운 삶을 선물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저에게 주는 선물로 한번 용기를 내보려고 합니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친다면 기회를 날려버린 저에게 또다시 실망할 것이고, 그래서 이 결정은 제가 스스로를 더 좋아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저는 몇십 년을 더 살 것인데, 남은 인생 동안 내가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다면 고작 몇 년 정도는 낭비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요.
퇴사 후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퇴사할 결정을 했다는 것 자체로 저에게 벌써 한 발짝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나도 오롯이 나만을 위해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며. 스스로를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뿌듯함은 평생 남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퇴사를 결심하였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마음 한편이 조금은 가벼워졌습니다.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 있지만, 이전과 달리 저는 강하고 쉽게 부서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솔직한 감정을 따라 한 걸음을 내디뎌보겠습니다. 저는 이제 그 무엇도 아니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요즘, 정든 동료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새삼 나는 복 받은 사람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습니다. 저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따뜻함을 느낍니다. 작년,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의 저의 그 아쉬움이 여러분들의 아쉬움이 되어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함께해줘서 고맙습니다. 고된 직장 생활에서 당신들은 더운 하지의 한 그루 나무처럼 저에게 쉴 공간이 되어주었습니다. 덕분에 많이 웃었고 즐거웠습니다. 같은 조직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줘서, 내가 이렇게 많은 동료들을 애정할 수 있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들이 있어서 평생 좋은 기억으로 남을 저의 첫 직장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네요.
여러분들의 남은 가을과 겨울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제가 없는 그곳에서 저의 근황을 종종 궁금해해 주길 바라고, 저의 앞날을 걱정하기보다는 응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곳에서의 하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더위가 끝나갈 입추 무렵 시원해진 바람을 반가워하셨으면, 가을 단풍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산책도 하셨으면 합니다. 겨울에는 흰 눈을 맞으며 뜨거워진 머리와 가슴에 평온함이 찾아오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는 단단한 마음가짐으로 앞으로도 하루하루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