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가난은 늘 높은 곳부터 시작된다. 이곳도 어느 동네처럼 촘촘하게 짜진 가난이 즐비하다. 좁다란 계단과 을씨년스러운 배고픔이 보이는 골목이 비좁게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이 곳에서만큼은 절대로 이방인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고 애써 누군가가 자세히 봤으면 안쓰러울 만치 웅장함을 느낄 것이다. 낯빛은 불그스름하게 앳되고 맥박은 긴장하고 들떠서 숨도 넘어갈 듯 빠르다. 오로지 이 순간, 동이 트지 않을 것만 같은 새벽 어두움의 절정에 있을 뿐이다. 바람도 제법 차다. 차가운 바람과 짙은 암흑 사이에 다시는 동이 트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온몸이 차갑게 떨린다. 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까지 와 닿고, 숨소리는 이미 멎은 듯 동공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금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그런 공포가 몰려오고 있을 때 느닷없이 앞이 보였다. 가로등이다. 자세히 보니 낡고 낡은 초점 잃은 전구는 당장이라도 왜 켜졌을지 의심스럽게 오락가락 껌벅이면서 가느다란 불빛인데 너무나 밝아 눈이 부실 지경이다. 나는 앞서가는 선배의 뒤를 따라 한 집 건너 한 집씩 열심히 피(유인물)를 대문 사이에 끼운다. 어떤 유인물은 비좁아 들어가지 못한 채 튕겨 나왔다. 튕겨 나오는 찰나의 느낌이 나를 당기고, 한 장의 피도 버리지 않으려고 나의 새벽은 달렸다.
7,000 동양고무 노동자여 단결하라!”,
“동양고무 기업주는 노동자에게 사죄하고 즉시 임금을 인상하라!”,
“이 나라 경찰이여, 공정하게 수사하라! - 출처 : 오픈아카이브
생각해 보면 그곳만이 가난이 아니었지만, 처음 각성한 곳이 바로 그 비좁고 암울한 골목이다.
태양이 떠오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쯤 마침내 동네를 벗어나고 있었다. 뛰는 듯한 떨림과 두려움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짭새가 내 어깨를 잡아당길 것만 같아 지나온 길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작은 교회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
허름한 건물 안에 셋방살이하는 그곳, 붉은 십자가가 없다.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왜 여기로 왔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미 이곳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모든 기억은 사라졌다. 스무 살 동안 살았던 인생이 리셋되었다. 나의 작은 소망도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봤다. 나의 시선이 다시 멈칫한다. 냉기만 살짝 없을 뿐, 바깥공기와 매한가지인 추위. 둘러보니 천장조차 높지 않고, 벽지는 오래된 습기가 다 젖어 제대로 마르지 못한 채 거무튀튀한 곰팡이가 군데군데 처참하다. 사실 교회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들어가는 여닫이문을 열면 정면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흑백사진 한 장과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한쪽 벽 중앙에 있다. 이렇게 연명하고 있는 모습의 교회가 끝없이 슬프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내 생각으로 끝난 슬픔이다. 바닥에 방석만 깐 상태에서 눈동자만 반짝이는 몇몇 사람들. 예배는 이미 끝났고, 나는 여기에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 이상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낯설지만 뭔가 활화산 같은 얼굴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밝고 힘차게 웃었다. 해맑다 못해 따뜻하다. 목사님과 장로님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내 소개가 끝난 것 같고, 갑자기 어디선가 노래를 부른다.
찬송가가 아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처음 듣는 민중가요가 나의 심장에서 폭발한다.
모두가 열띤 목소리로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고, 노동자 해방을 말한다. 당감동에 있는 동양고무 노동자들과 함께 임금인상 투쟁을 외치고 있다. 어린 시절에도 알았을까?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는 사람이 먼저가 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나는, 그날 나의 하나님이 현존했다.
낮은 곳으로 십자가를 매고 가는 예수그리스도를 봤다. 구원이다. 피 흘리는 예수를 본 것 같다. 사실 그 전 다니던 교회는 그저 따뜻한 겸손을 강요했다. 무엇보다 화려했다. 붉은 십자가는 동네를 비춰주었으며, 성탄절이 오면 온 세상이 주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행복했다. 나는 늘 소박하지만, 절박하게 나의 소원을 빌었다. 어린 나이에도 우리 집의 형편을 온몸으로 느꼈으며 그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매우 중요하게 내 인생을 결정짓게 했다. 상업고등학교를 선택하고 주산이며 부기를 배웠다. 의무감과 더불어 약간은 드라마틱한 나의 감정에 내 현실을 곁들여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장녀의 책임감이 충만할 때였다. 이런 상황의 어린 나의 기도는 이미 결정지어졌다. “부자가 되게 하소서” 교회는 원래 늘 그런 곳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다가온 이 작은 교회는 그러지 않는다.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해 기도 한다. 민중이라는 단어도, 노동자라는 단어도 처음 다가왔지만 나의 빛나는 가슴은 그 엄청난 개념을 받아들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직 “낮은 데로 임하소서.”
나는 멈춘다. 다리가 저리고, 목이 까칠까칠하다. 숨이 제대로 쉴 수 없는 자리에서 내 인생의 화두가 던져졌다. 저 볼품없는 교회가 너무나 성대하게 나로 향해 직진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현실보다, 그 슬픈 가치가 도둑맞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지금의 내가, 이곳에서 흥분하고 있다. 흔들리지 않은 눈빛 하나로 외치는 소리가 공명이 아니라, 울림이 되어 돌아올 것을 믿었다. 그런 밤이 지속되었고, 나의 교회는 그렇게 내 생으로 들어왔다. 철없는 날로 치부하기에는 그 뜨거운 기도가 아름답기까지 했다. 지금 나는 당감동 골목길에서 새벽을 찾아가고 있다. 새벽공기는 알싸하면서도 떨렸고, 심장은 거의 멈추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노동자들을 생각하는 나의 젊은 심장은 그렇게 청춘을 열었다. 동양고무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한 푼도 없이 아르바이트로 하루를 연명하면서 냉기 가득 찬 골방에서 움츠리면서 지내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내 처지가 더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꼭대기 집에는 추억이라 하기에는 절망뿐인 방들이 즐비했다. 하나뿐인 수돗가에서 빨래나 밥을 지을 때, 어쩌면 모던보이 이상李箱을 생각하면서 낭만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굶는 날이 자주 있었고 절박하지만, 더 내려가지 못하는 가난이 내 시간을 가둬버렸다. 자주 망가지는 연탄아궁이는 내 집에서 나를 밖으로 내몰고 있다. 낡은 알루미늄 샷시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연탄아궁이가 있고, 그 옆에 낡은 찬장이 있다. 그나마, 나는 난로가 있다. 난로가 주는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묘하다. 성냥불로 난로에 불을 붙일 때 이글거리면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는 내가 오늘 집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끝자락에서 매달려 있는 외로움을 달래기에는 부족하지만, 낯선 도시에서 찾은 유일한 따뜻함이다. 그렇게 외로운 쪽방에서 연탄가스로 죽을 까봐 밤만 되면 창문을 조금 열어 놓고 잔다. 그렇게 혼자 있는 그 길에서 만난 새로운 세상. 산꼭대기라 빛을 걱정하지 않는다.
빛을 향해 오늘도 저 골목으로 올라간다.
그날 아침 우리는 교회로 다시 모였다. 집사님이 끓여 주신 뜨근뜨근한 라면 한 그릇이 우리의 위장을 데웠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설교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과거도 미래도 아닙니다.” 말씀 한마디가 뜨거웠다. 그만큼 뜨거웠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