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을 끝내고 경주 자연의원으로 가는 아침, 집에서 아빠랑 둘이 있을 아이에게 편지를 쓰려는데 손가락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아파서 인대가 늘어났거니 생각하며 요양을 떠났다.
경주까지 가서 통증 의학원에 내려가 주사를 맞고 지지대로 감싸면서 낫거니 생각하며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만성적인 나의 아픈 상처가 되어 나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병명은 건초염. 방아쇠염.
건초염이 왜 생겼을까? 그것도 항암이 끝나고 이제 살아갈 일 만 남은 나에게 왜 건초염이란 병이 생겼을까? 속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아픈 걸까?
건초염은 생명 하고는 상관없으니, 감사하다. 아프고, 불편할 뿐이니 너무 감사하다. 나는 나를 위해 그렇게 위로하면서 병원이라면 지긋지긋하고 주사니 약물치료에는 더욱 의존하고 싶지 않아 집 앞에 있는 한의원과 신경외과를 번갈아 다니면서 치료를 시작했다.
신경외과에서도 약물과 주사는 사용하지 않고 파라핀 요법과 물리치료를 사용했고, 한의원은 침 요법을 중심으로 치료하였다.
3개월 나의 일상은 오전에는 한의원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이 되었고, 열심히 치료에 집중했다.
그런데 나의 성실을 나의 열성을 무시하듯 오른쪽 엄지손가락에서 시작된 건초염은 왼손으로 옮기더니 왼손을 집어삼켜 버렸다. 결국, 애써 외면하던 약물치료를 위해 소문 따라 강남까지 가게 되었다. 류머티즘 전문 병원이라는 곳을 갔는데, 이십오만 원의 검사비용을 내고 류머티즘이 아니라는 사실과 주사와 소염제 처방을 받아서 복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활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몰랐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병을 앓고 나서 이까짓 손가락쯤이야 하면서 얼마 있다가 낫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다. 생활 병은 삶의 질을 엉망으로 만든다. 손가락에서 시작해서 두 어깨까지 아프게 되면서 생활 병이 얼마나 무섭고 힘든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문득, 나의 손가락을 쳐다보는데 주사와 약물로 나아지고 있지 않음을 느끼고, 다시 절망하고 애써 괜찮다고 말하고 위로하면서 집 앞에 있는 한의원을 다니게 되었다.
이런 내 생각과 일치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젊은 원장님은 이내 자신의 지식과 환자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차릴 뿐 아니라 환자와의 소통을 제대로 하고 있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암센터 주치의는 몇 개월에 한 번 밖에 가지 않는데도 차트만 보고 짧게 차트에 나오는 수치로만 나에게 이야기한다. 어느 날은 얼굴도 보지 않고, 차트의 데이터만 보고 보고서 읽듯 몇 마디 던지고는 "3개월 후에 다시 날 잡고 그때 봅시다." 1분 만에 끝이다.
나와 남편은 "네"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우리 식구들은 3개월을 기다리다 만난 의사 선생님이 환자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차트만 보면서 던지는 몇 마디를 기다리기 위해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오므라졌다 펴졌다 하는데, 정작 의사는 무정하게 던진다. 그리고 환자의 3개월 생활은 오직 CT와 X-RAY에 나타나는 데이터와 수치로 판단한다.
용기 내어 나의 몸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갈 때마다 이야기하게 되고, 돌아가서는 나의 생활에 긴장감을 가지고 노력하게 된다.
이제 오른쪽 손 엄지손가락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 약물요법을 사용하지 않고 이 정도로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마냥 고맙고, 행복하다.
병원이란 조금 덜 아프게 되면 오라고 해도 가지 않는 것이 병원이다. 나도 처음에는 거의 매일 가다 이제는 일주일에 3일은 꼭 가야지 하고 마음먹어야 겨우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