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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체를 해석하면 그것은 주체로써 존재한다.

by 이관휘

20대 무렵부터 저는 창작가로써 존립하길 원했습니다.

당연시 나는 그런 사람으로써 존재해야 한다는 믿음이 존재했던 것 같네요.

이런 저런 이념과 아티스트들의 저서를 참고하며 역사를 다져갈 때쯤

내가 그들의 대용품으로써 존재하고 복제해간다는 느낌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공부를 놓아버렸습니다.

그놈의 오리지널리티가 무엇인지

우주가 그렇듯

저의 안의 무언가가 스스로 빚어지고 존립하길,

제 예술의 생태계가 존재하길 바랐습니다.

하지판 레퍼런스가 주는 힘은 지대하더군요.

특히 상업에서 무언가를 참조하는 것 만으로

인력을,투자재화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기에

​이것에 기대며자존심은 접어가며 일을 해오던 찰나

프랑코 폰타나라는 사진작가의 전시를 보러갔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그곳에서 만난 문장입니다.

'객체를 해석하면 그것은 주체로써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 필독도서 중 하나라는 총,균,쇠를 100명이 읽고 독후 감상을 얘기한다면

100명의 의견이 같아야 할까요?

당연히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챕터는 다를 것이고

그에 따라 대화주제도 천차만별이 되겠죠.

그렇다면 한번 더 나아가서

서울대의 필독도서와

지방대의 필독도서의 두가지가 있다면 우리는 가치적인 측면에서 어떤 기호를 선택하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대부분이 전자를 선택하게 될거에요.

왤까요​

우리의 경험적, 주체적인 사상과 가치관 이전에

사회가 강조하는 내러티브가 더욱 중요하게끔

우리의 머릿속에 셋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편하고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앞선 서울대 필독도서의 예시에서

100명의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을

우리모두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후자의

서울대vs지방대 필독도서 예시에선

우리는 생각해볼 여지를 가지게 되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주체적이고

반대로 어디까지 수동적일까요?

나의 주체는 어디서 작용하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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