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지지 말라는 말씀
신임 보좌신부님의 첫인사
9월 첫 번째 토요일, 매달 이날은 성모성심미사를 봉헌한다. 특별히 성모님의 은혜와 성사에 감사하고 우리가 지은 죄의 용서를 구하는 예식이다. 미사가 막 시작되려는데 낯선 신부님께서 제단에 오르신다. 키가 훌쩍 크고 후리후리하시다. 머리칼은 하얗게 셌는데, 이목구비는 젊어 보인다. 그 외모만으론 그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찬미 예수님’ 하고 인사하시는데 목소리가 우렁차고 힘이 느껴진다. 청년이 맞구나 싶었다. 그는 자신을 ‘새로 온 보좌신부’라 소개한다. 지난 7~8개월 동안 우리 본당엔 보좌신부님이 안 계셨다. 이규원 마르코 신부님께서 부천으로 가신 후 후임 인사가 없었다. 그 통에 그동안 주임 신부님께서 얼굴이 다 핼쑥해지도록 혼자 고생 많으셨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보좌신부님께서 드디어 오셨다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나를 포함해 몇몇 신자들은 박수까지 칠 뻔했다. 황급히 손을 거두긴 했지만, 신부님께서 그걸 보신 모양이었다. “미사 중 박수는 좀 그렇지요, 더구나 오늘은 성모님 신심미사니까요. 그게 익숙해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뭐든 익숙하게 되면 안 됩니다.”하신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신자들은 일순 긴장했다. 강론시간이 아닌데 신부님 말씀은 잠시 더 이어졌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어머니 마리아께 그 옆에 있던 요한을 일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라 하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어머니께도 익숙해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요한 19.25=27 참조).”
어쩌다 보니 우리의 첫인사가 ‘익숙해지지 말라’가 됐다. 그 뜻과 어감이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닌 것 같은, 그 뜻을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그 말씀이 보좌신부님의 일성이 됐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이 그랬다. 우린 살면서 생전 처음 겪는 상황과 자주 마주친다. 거의 모든 게 다 그렇다. 나이를 먹어도 마찬가지다. 우린 그렇게 겪으며 배운다. 그게 인생이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사람은 그에 익숙해진다.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그저 기계적으로 관성적으로 반응한다. 그게 또 반복되다 보면 귀찮아 하기까지 한다. 이른바 ‘타성’에 젖는 거다. ‘여유가 생긴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게으름의 다른 표현이다. 교만의 전조다. 결국 상황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나태하게 되고 끝내 교만에 이른다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익숙해진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그러다 보면 그는 의당 거기 있어야 하는 존재로만 인식한다. 끊임없이 날 위해 무언가를 해주기만을 바란다. 마냥 편하니 그를 대하는 긴장감은 사라지고 예의나 격식도 차리지 않는다. 고마움이나 소중함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익숙함이 친밀도를 높이기보다 관계를 망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신부님 말씀이나 오늘의 복음 말씀에 담긴 뜻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으셨지만 당신은 한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시다. 예수님이 그러시듯 그 어머니도 온 인류의 어머니이시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자녀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은 당신 어머니라 할지라도 개인적이고 인간적 관계에 연연하지 마실 것을 강조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해지지 말라. 그런 면에서 참으로 좋은 말씀이시긴 한데, 솔직히 내겐 조금 매정하게 들린다.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만 살까 싶어서다. 사람에겐 ‘정’ 혹은 ‘연민’이라 게 있다는데, 그건 타고난 본능이라는데, 그래서 그건 내리누른다고 마냥 참아지는 것만은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난 신부님 말씀을 믿고 한번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신부님의 굳은 표정과 목소리에서 그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연민’이니 ‘정’이니 했던 말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면서 그저 ‘익숙해서’ 쓴 말일 뿐이다. 그렇게 강렬한 첫인상으로 우리에게 오신 정민기 로베르토 모세 신부님을 마음 속으로 환영했다. 그와의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그러니 신부님 좋은 말씀 많이 부탁드립니다.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